"그 많은 장관이 김대중 하나 못 당하나" 박정희가 대통령, 김대중이 국회 입성한 1963년

박정희와 김대중<12>
1963년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2년 넘게 군정을 이끌던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10월 15일 치러진 제 5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12월 17일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제 3공화국 출범이자 1979년 10월까지 16년 동안 이어질 박정희 시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1963년 대통령이 된 박정희...국회에 입성한 김대중
그 대선 한 달 열흘 후인 11월 26일 제 6대 총선이 치러졌다. 김대중은 고향인 전남 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1954년 제3대 총선 때부터 4번의 도전(3대 총선 목포 낙선, 4대 총선 인제 후보등록 실패 및 보선 낙선, 5대 총선 인제 낙선)에서 연거푸 실패했고,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사흘 후 박정희가 이끈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상실하는 등 연속된 고난 끝에 얻은 승리였다. 6대 국회도 대통령 취임식과 같은 날인 12월 17일에 개회했다. 김대중은 마치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의정활동에 의욕적으로 매달렸다.

그는 국회 본회의 발언이나 상임위원회 질의에 앞서 늘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했다. 국회 도서관을 가장 많이 찾는 의원이었고,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한 뒤 발언에 나섰다. 박정희 정부의 국무총리와 장관들을 일문일답식 질의로 날카롭게 추궁해 쩔쩔매게 했다.
TV 현장중계가 없었던 당시에는 유선으로 청와대 집무실에 연결해서 박정희가 국회 상황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각료들이 쩔쩔 매는 것을 듣고는 “아니 그 많은 장관들이, 그 많은 인재들이 어찌 김대중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하는 거요. 한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오!”라고 다그쳤다고 한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박정희의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으로 정국은 요동쳤다
그러나 김대중은 정부 여당을 무조건 몰아대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한일국교정상화 문제다. 그는 야당들과 학생, 재야 시민사회의 거센 반대와는 다르게 한일국교정상화가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 회담은 원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미국을 비롯한 48개 연합국이 일본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의 권고와 미국의 적극적 종용으로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1년 시작됐다. 민주당 정부까지 5차에 걸쳐 진행됐지만 과거사 사과문제와 청구권 규모를 둘러싼 현격한 입장차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혁명 공약’으로 내세운 5‧16 핵심 세력은 한일국교정상화로 받게 될 대일 청구권에 주목했다. 박정희의 만주군 및 일본 육사 인맥이 일본의 정계와 재계에 폭넓게 포진하고 있다는 점도 그들이 믿는 구석이었다.
5‧16 주역 중의 한 사람으로 한일회담의 총대를 멨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당시 중앙정보부장)는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하는데,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 청구권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이것이 ‘오랜 시간 속에 숙성된 생각’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와이즈베리).

김종필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14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하는 길에 도쿄에 들러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회담을 갖도록 추진했다. 중앙정보부의 일본 인맥을 통해서였다. 김종필이 먼저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 이케다 총리를 만나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워싱턴 방문 이틀 전인 11월 12일 도쿄에서 박정희-이케다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박정희는 회담이 끝난 뒤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이 대일 청구권에 성의를 보인다면 우리는 평화선(해양 주권) 문제에 신축성을 보이겠다”고 밝혔다. 한일 회담의 핵심이 대일 청구권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김종필 앞의 책).
한일 정상회담에도 대일 청구권 규모 놓고 의견차
박정희-이케다 정상회담으로 한일회담이 동력을 얻었지만 대일 청구권 금액의 규모 등을 놓고 양국의 견해차가 여전히 현격해 1년이 넘도록 진척이 없었다. 김종필은 일본이 생각하는 청구권 규모를 가늠하기 위해 민주당 시절 5차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던 유진오 박사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실로 초빙했다. 유 박사는 “일본이 우리한테 정말 얼마나 줄 수 있다고 보시는가”라는 박 의장의 질문에 “일본 사람들에게 들었지만 3,000만 달러 이상은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김종필 앞의 책).

이런 규모의 청구권 금액으론 우리 국민들의 설득은 턱도 없고, 막대한 경제개발 자본이 절실한 박정희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박정희는 8억 달러를 마지노선으로 잡고 있음을 김종필에게 밝혔다.
지침을 받은 김종필이 1962년 10월 미국 방문길에 다시 일본에 들렀다. 이케다 총리와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을 만나 조정 작업을 벌였다. 일본 전국시대 인물들의 ‘두견새 울리기’ 고사(古事)까지 동원해 밀고 당긴 끝에 합의에 도달한 것이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무상 3억 달러, 유상(대외협력기금) 2억 달러, 수출입은행에서 1억 달러+알파’를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김종필 앞의 책).
이 같은 합의 내용은 한동안 비밀에 부쳐졌지만 점차 그 윤곽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박정희 정부도 1964년 3월 타임 라인을 공개하며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을 본격화했다.
야당과 시민사회 거센 반발에도 김대중은 "한일 국교 정상화" 필요 주장
야당들과 학생, 재야 및 시민사회에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제1 야당인 민정당의 윤보선 총재는 ‘한일협정 결사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야당과 각계 대표 200여명은 6차 한일회담 본회의 개최 3일을 앞둔 3월 9일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왜놈과 국교정상화는 제2의 경술국치이자 을사조약이다’와 같은 구호가 넘쳐났고 박정희 하야 요구까지 나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야당 정치인이 신념에 따라 한일국교정상화에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김대중은 소신을 분명하게 밝혔다. 야당 연합 모임에서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는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대안을 마련해야 하며 상호이익이 보장된 협상안이라면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김대중은 북한과 중국 소련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이 일본까지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삼을 수 없으며 경제발전을 위해 한일국교정상화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수많은 국가들이 식민 종주국과 다시 국교를 맺고 있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당시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저력과 잠재력을 알고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미루면 자칫 세계의 흐름을 놓치고 결국 우리만 고립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김대중 앞의 책).
그러자 야당 주변에서 “김대중은 여당 첩자다. 사쿠라다. 사쿠라 중에 왕사쿠라다”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사쿠라’는 권력에 매수된 변절자라는 뜻이다. 당시는 야당 의원에게 사쿠라 딱지가 붙으면 치명적이었다. 바로 정치 생명이 끝장나던 시절이었다. 김대중이 여당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퍼졌다. 조흥은행 남대문 지점에서 발행한 수표로 3,000만원을 받았다며 수표 번호까지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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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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