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로그] 의료기술 강국 한국, 기초의약학 토대는 취약

대한민국은 지난 수십 년간 세계가 놀랄 만큼 빠르게 의료기술 강국으로 성장했다. 로봇 수술, 정밀의학, 인공지능(AI) 진단, 줄기세포 치료 등 첨단 기술이 임상 현장에 빠르게 도입되면서 의료서비스 수준은 이미 선진국에 견줄 만큼 높아졌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신속 진단 기술과 치료제 개발, 의료데이터 기반의 방역 대응은 세계가 인정한 ‘K-의료’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구조적 불균형이 존재한다. 임상 기술과 의료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반면 그 근간이 되는 기초의약학 연구의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의학·치의학·한의학·약학 대학의 기초교실 교수 충원이 지연되고 젊은 연구자들이 기초의학 전공을 기피하는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실제로 의대 대학원생 중 기초의학 전공자는 2~3%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이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인력 문제를 넘어 의료기술 혁신의 지속 가능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구조적 위험이다.
모든 의료기술의 출발점은 ‘기초’에 있다. 암 면역치료, 유전자 치료, 백신, 표적 항암제 등 혁신적인 치료법들은 세포와 분자 수준에서 질병의 원리를 규명한 기초의약학 연구의 결실이다.
생리학, 약리학, 병리학, 면역학 등 기초의약학은 질병의 원인 규명과 신약 개발, 새로운 진단 기술 창출의 기반이 된다. 하지만 산업적 가시성과 단기적 성과가 낮다는 이유로 기초의약학은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종종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생애 단계별 연구자 성장 지원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박사후연구원(Post-Doc) 성장형 사업을 통해 초기 연구자에게 독립적인 연구 기회를 제공하고 우수 신진·핵심(舊, 중견) 연구사업을 연계해 연구 역량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한 2009년부터 운영 중인 기초의과학육성센터(MRC) 사업은 질환의 기초 기전을 탐구하고 학문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기초의학 전공자 부족으로 많은 센터가 연구 인력 확보와 연구의 수월성 제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한편 보건복지부의 임상의과학 연구 역량 강화 사업은 의사 중심의 연구 역량을 강화하며 병원 기반의 연구 생태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특히 2019년부터 시행된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사업’을 통해 배출된 MD-PhD 연구자들은 임상과 기초를 잇는 핵심 연구 인력으로 성장해 의료기관의 연구 혁신과 기술 이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기초의약학 분야에서도 체계적인 인재 양성 시스템과 정책적 지원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다.
현행 '기초연구진흥 및 기술개발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기초연구는 기초과학 또는 기초과학과 의학·농학 등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 활동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실제 운영에서는 기초과학 중심으로 정책이 설계되어 있어 의학·약학·치의학·한의학 등 응용 기초 분야는 기초연구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기초의약학은 기초과학과 임상 응용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기에 연구비 배분과 평가 체계에서 별도의 범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미국의 MSTP(Medical Scientist Training Program)이나 일본의 CiRA(교토대 iPS세포연구소)처럼 주요 선진국들은 기초의학 중심의 연구개발 전략을 국가적 기둥으로 유지해왔다. 임상기술의 혁신이 오늘의 치료를 바꾼다면 기초의학의 혁신은 내일의 의학을 만든다.
대한민국이 의료기술 강국을 넘어 의료과학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초의약학을 국가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기초교실의 재활성화, 연구자 생태계 복원, 융합 연구 촉진, 평가 제도 개선 등 종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이 바로 ‘보이지 않는 뿌리’인 기초의약학을 튼튼히 세워야 할 때다. 그것이 대한민국 의료의 미래를 지탱하는 진정한 힘이 될 것이다.
[허강민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본부 의약학단장 gmhur@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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