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젤렌스키 포기 못 한 '나토 가입', 우크라 국민은 환상 버렸다

정승임 2026. 2. 2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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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전쟁 4년]
<4> 나토 가입 환상 버렸다
젤렌스키, 최근 뮌헨 안보회의에서
'우크라 나토 가입 당위' 강조했지만
정작 시민들은 트럼프 2기 출범 후
"나토 가입이 과연 좋은 선택지냐"
'反우크라' 헝가리도 마이너스 요소
전쟁 발발 4주년인 24일 기자회견에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키이우=AF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군대는 유럽에서 가장 강하다. 이 강한 군대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밖에 두는 건 현명하지 않다.”

14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안보회의(MSC)가 열린 바이어리셔호프 호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작심 발언에 회의장에선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불과 두 달 전 베를린에서 미국 대표단과 회동 직전 “우리의 초기 목표는 나토 가입이었지만 미국과 일부 유럽 파트너들은 지지하지 않았고 이에 법적 구속력 있는 안보 보장을 받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며 가입 포기를 시사한 것에서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맨 앞 청중석에 앉은 유럽 지도자들을 향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최소한 여러분의 결정이어야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결정이 돼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전 요건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영구 포기’를 제시한 러시아에 휘둘리지 말라는 뜻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 직후 그와 토론 세션에서 마주 앉은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4주년을 열흘 앞두고 나온 그의 발언은 “우크라이나는 아직 나토 가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공개선언으로 들렸다.


"우크라 나토 가입, 푸틴에 휘둘려선 안 돼"

14일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오른쪽)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이 토론 세션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뮌헨=AFP 연합뉴스

그러나 사흘 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만난 시민들의 반응은 달랐다. 나토 가입에 대한 회의론이 주를 이뤘다. 대학생인 안드리안나(19)는 “나토가 우리를 보호해줄 거란 믿음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토에 가입한다 해도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공동 방어한다’는 집단방위조항(나토 헌장 5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거란 불신이었다. 므하일로(37)는 “우리가 일찍 나토에 가입했다면 이 전쟁을 막을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드므드로(44) 역시 “이제 와서 나토 가입을 고려해선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4년 전 전쟁 발발 당시만 해도 서방의 집단안보체제인 나토 가입은 우크라이나에서 사회적 합의이자 국민적 염원이었다.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을 안전판이라 굳게 믿었다. 2019년 개정된 헌법에 ‘나토 가입 추진’이 명시될 정도였다. 1994년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러시아∙영국으로부터 안전 보장을 약속받은 ‘부다페스트 각서’가 러시아의 침공을 막지 못하자 우크라이나는 ‘종이 문서’보다 더 확실한 안보 보장을 원했다.

역설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은 러시아가 이 전쟁을 시작한 명분이기도 하다. 1989년 독일 통일 협상과정에서 서방으로부터 “나토 동쪽 확장 금지” 확약을 받았다고 여긴 러시아는 자국 국경을 향한 나토의 동진(東進)을 중대 위협으로 규정했다. 특히 국경을 마주하는 우크라이나는 마지노선이었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좋은 선택지냐" 회의론

18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에 전시된 러시아군의 자주포와 전차들. 우크라이나군이 영토를 탈환한 뒤 일종의 전리품 차원에서 획득한 무기들이다. 키이우=정승임 특파원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러시아 위협에 굴복해 나토 가입에 의구심을 갖게 된 건 아니다. 지난해 ‘유럽의 안보 무임승차’를 지적하며 나토에서 발을 빼려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익명을 요구한 50대 남성은 “미국이 나토의 힘을 빼려고 하는 상황에서 나토는 옛날의 나토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반 호므자 키이우경제대학원(KSE) 교수도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나토가 분열된 조직으로 인식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어졌다”며 “나토 가입이 정말 좋은 선택지인지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나토 내 헝가리와 같은 우크라이나에 비우호적인 회원국의 존재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다.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과 같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 수 있어서다. 유럽연합(EU) 회원국이기도 한 헝가리는 23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900억 유로(약 153조 원) 규모의 긴급대출금 지원안에도 반대표를 행사했다.

호므자 교수는 “우크라이나의 목표는 확실한 안보 보장이지 단순히 나토 회원국이 되는 게 아니다”라며 “나토가 그런 역할을 못하면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의지가 있는 국가와 양자 혹은 다자동맹을 맺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뮌헨∙키이우= 정승임 특파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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