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2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올해로 57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 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지난해 10~11월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2월 독회 추천작은 김성중의 소설집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문학동네)와 김엄지 소설집 ‘위리’(문학동네)입니다. 이번 달엔 문학동네가 약진했습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
기나긴 연도로서의 최후의 만찬
김성중의 소설집,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문학동네, 2025.11)에 실린 소설들의 주제는 한결같다. 루저들의 ‘제 우중충한 삶으로의 고꾸라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본적인 패턴은 이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또는 양상으로 주인공(혹은 화자)은 좌절과 고독의 삶을 겪고 있다. 나는 무언가 현실의 재료들을 이용하여(책이나, AI 과학, 비밀 결사...) 새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나는 현실로 돌아가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에 적응하며 살고자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은 모두 작은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이다. 탕아의 귀환. 정신의 성숙. 그런데 김성중 소설의 인물들에게서 정신의 성숙은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작가에 의해 그런 체벌은 거부된다. ‘착하게 살려고’ 아무리 다짐해도, 캔맥주 속의 위젯 안으로 축소되어 들어가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낳고 고생하고 죽고, 낳고 고생하고 죽고....
양상은 다르지만 한결같은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편소설 하나로 충분한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것은 일종의 반복 강박이다. ‘쾌락 원칙’의 세계(현실)에서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는 시시포스의 모험이다. 그 점에 착안하여 다시 본다면 이 소설이 마냥 한결같은 되풀이를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제가 말하는 대로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왼손잡이는 이탈자의 표지이고 꿈은 다른 세상의 전조이다.
김성중 식 모험에서 독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역할의 붕괴이다. 왜 붕괴가 필요한가? 인물들의 비루한 운명을 결정짓는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소설 「유령들」에는 ‘저승사자’가 그 권력자이다. 저승사자에게 코가 꿰인 ‘죽은 나’의 내부에서 서술자가 튀어나와서 따진다. ‘나’가 만들어진 존재인 것처럼 ‘저승사자’ 역시 역할이 부여된 만들어진 존재에 불과하다. 누가 됐든 현실의 무대에 등장하려면 그 피조물성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모든 소설 속 존재들은 상대방을 자신의 그림자로 갖는 동등한 존재들이다. 서술자에 의하면, 죽은 자도 저승사자를 그림자로 가졌으니까, 죽은 자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서술자의 존재, 이야말로 문학의 특권이다. 우리는 모두 삶을 직접적으로 산다. 과학자이건 자동차 산업 노동자이건. 그들이 하는 일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지적 생명은 ‘생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어느 날 깨닫게 되었다. 생산을 추찰하는 존재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생산에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가진 존재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게 예술가, 문학가, 철학자들이다.
이들의 기본 필요 조건이 하나 있다. 생산을 하지 않으니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하지 않은 예술가, 문학가, 철학자들은 피카소를 제외하면 다 가짜들이다. 이런 조잡한 우화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으니, 각설하기로 하자.
포인트는 문학만이 서술자(화자)에게 존재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으며, 서술자의 역할은 모든 역할의 붕괴라는 것이다. 그 붕괴는 당연히 현실이라는 틀의 붕괴를 겨냥하고. 현실의 이름으로 세상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독재자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현실이라는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으니, 무언가를 더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앞의 서술자가 논리적 추론자, 현실의 허위를 고발하는 자라면, 또 다른 서술자의 역할은 현실의 물상들을 무용하고 순결한 표현들로 대체하는 것. 즉 쓸 데가 없어서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다. 서술자는 여기에서 표현자가 된다.
김성중 소설들에서 가장 느낌이 오는 부분들은 재치 있고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들이다. 문체는,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작가가 자신의 육체와 개인적 과거에서 길어낸 “맹목적이고 수직적인 힘”으로서 “역사 위를 흐르는 신선함(une Fraîcheur au-dessus de l’Histoire)”(『기술의 영도』, 1953)이다. 가령, 이런 기술을 보라.
뻐꾸기시계 같은 서술자를 품은 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강박적으로 청소를 하던 여자는 왜 하나의 관에 오롯하게 누워 있지 못하고 흩어져 각각의 장소에서 몸을 일으켰을까? 여자아이는 여장(女裝)을 통해서 여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죽음을 통해서 원래의 내가 되려는 중이다. 이백 개가 넘는 뼈와 육백 개가 넘는 근육, 매일 마시는 일만 리터의 공기. 이 모든 부속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나와 마지와 청소기, 그리고 그림자뿐이다. (p.43)
비유(“뻐꾸기 시계”), 대조(‘여자 아이’-‘죽은 나’)를 통한 모든 존재들에 대한 반향, ‘나’의 구체성과 구체성의 허망함(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는).. 그리고 이런 것들을 이끌고 가는 문장의 능갈맞음. 김성중은 김승옥·윤대녕을 위시한 문체주의자의 반열에 자신을 등록시킨다.
이 문체를 두고 바르트는 “역사 위를 흐르는 신선함”이라고 말했다. 이 글의 맥락에서 저 말을 치환하면 ‘현실의 성벽을 비스킷처럼 부숴서 맛있게 먹게끔 하는, 솔로 만들어진 분쇄기’라고 좀 지루하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의 문체는 그렇게 완강한 현실에 거듭 손질을 해댄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현실의 손톱만큼이나마 부스러뜨릴 수 있을까? 이 소설들의 주체들은 바로 그런 실천을 부단히 스스로 질문한다. 정말 현실을 부수려면 자신의 존재를 걸어야 한다. 그래서 “맨살에 바늘을 꽂는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p.252)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현실의 붕괴는 매 순간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이 정해졌다.
연도는 제식을 동반한다. 누군가는 돌에 박힌 장검을 뽑아야 하는 것이다. 김성중의 연도는 무언가로 다시 변해야 한다. 그게 무엇일까? 무엇일 수 있을까?
♦위리
우울의 청량감
김엄지의 소설집, 『위리』(문학동네, 2025.11)에서 ‘위리’는 무엇일까? 우선 이 단어는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다. 그렇긴 하나 그 사실이 그 단어의 뜻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서 ‘위리’라는 단어는 섬의 이름이자, 그 섬의 해변 이름으로 나온다. ‘위리도(位里島)’. 단어의 특별한 뜻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섬은 진도군에 속하는 작은 무인도이다. 작품 속에서 섬에는 “오래된 민박”, “매점 두 곳”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인물 ‘Y’는 카페에 앉아 그 섬에 가는 상상을 한다.
‘위리’는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를 가리키는 상징 어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위리’는 소설집 전체의 세 개의 두께에 반향한다.
우선, ‘위리’라는 단어 자체의 뜻 없음. 혹은 무인도라는 실체성은 이 소설들 밑바닥에 깔린 밋밋한 우울증에 조응한다. 이 우울증은 주인공 혹은 화자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실 부적응성에서 기인한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주인공 혹은 화자의 우울증이 이 소설집의 바탕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일반인들에게 ‘산다’는 것이 바탕이듯이 김엄지의 주체들에게는 ‘우울하다’가 바탕이다.
다음, ‘위리도’에 대해 ‘민박’과 ‘매점’을 넣는 상상. 이 상상에는 무인도를 여행지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 김엄지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우울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충동에 시달린다. 이 충동의 다양한 현상들은 바탕 위에 부는 바람이고 비, 눈, 그리고 우박이다.
마지막으로 이 상상의 재앙성. 작품을 보자면 ‘Y’가 카페에서 상상하는 동안 우박이 들이닥쳐 카페의 전면 유리창을 박살을 낸다. ‘Y’의 상상은 이미 좌절을 예정하고 있다. 그렇게 그 주인공들, 화자들은 이미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p.60).
여기까지 오면 ‘위리’의 뜻없음은 재앙이 된다. 독자는 이쯤에서 ‘위리(位里)’를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위리’로 읽을 법하다. 무의미한 생은 “가시로 울타리가 쳐진”(『표준국어대사전』) 채로 갇혀 사는 생이다. 삶은 귀양이고 형벌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Y’가 여자 친구에게 ‘위리’ 얘기를 들려주는 동안, 여자 친구가 자신의 노트에 ‘Y’의 얼굴을 그린 다음, 그 아래에 ‘위리’라는 단어를 비스듬한 모양으로 연속해 써서, “길게 이어진 위리는 사슬 혹은 무늬가 있는 하나의 끈처럼 보”(p.229)이게 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이 소설집의 진정한 시작은 바로 그 ‘완성’의 지점에서부터다. 방금 독자는 “위리는 사슬 혹은 무늬가 있는 하나의 끈”임을 읽었다. ‘사슬’은 주인공들의 삶이 형벌임을 그대로 가리킨다. 하지만 “무늬가 있는 하나의 끈”은 사슬에 어떤 뉘앙스를 주어서 변형시킨 것이다.
독자는 앞에서 김엄지식 주체들의 ‘생의 무의미’가 ‘현실 부적응성’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았다. 이 현실부적응성을 다른 말로 바꾸면 현실에 대한 ‘낯설음’이다. 단어를 바꾸자 기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현실부적응성’이 내게 맞지 않는 현실에 매여 있는 존재의 정서를 자아낸다면, ‘낯설음’은 내가 새로 의미를 부여해 볼 어떤 물상을 마주하는 호기심을 동반한다. 즉 무의미를 ‘낯설음’으로 만들고 다시 ‘낯설음’ 자체에서 ‘여직 몰랐던 또 다른 생의 기미’를 엿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언어의 다른 사용을 통해서이다. 즉 삶을 묘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이 소설집 전체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대신ㅡ 시시각각으로 곳곳에서 드러난 현실의 조각들을 미묘한 감각들을 일으키는 단서들로 만들고 있다. 거기에서 현실의 무거움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깨진 유리조각(현실)의 편린들이 아지랑이처럼 춤추며, 무거운 현실 그 바탕으로부터 튀어오르는 것이다. 그 현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바닥에 즐비한 유리 파편이 촛불 빛에 번쩍이고 일렁인다.
유리 바닥이 아니라 불 바닥 같다. (p.230)
김엄지 소설의 매력은 바로 이 감각의 눈뜸이며, 이것이 우울한 현실에, 아니 우울증 자체에 ‘청량감’을 부여한다.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연속적으로 닥치는 것은 독감 후에 문득 놀려보는 코의 상쾌한 벌렁거림 같은 불수의적 동작들이다.
이것을 두고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의 환자였던 ‘안나 O’는 “굴뚝 청소”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옥타브 마노니Octave Manoni, 『프로이트』, 1979). ‘안나 O’는 깊은 우울성 환상(melancholic phantasies)과 마비, 환각 등 중증 히스테리 증상을 앓고 있었는데. 최면 상태에서 자신의 억압된 기억과 감정을 말로 털어놓았을 때 증상이 사라지며 시원한 해방감을 느꼈고, 스스로 이를 ‘대화 치료(talking cure)’ 또는 속이 시원해진다는 의미에서 ‘굴뚝 청소(chimney sweeping)’라고 불렀다.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빌려 ‘카타르시스 요법’이라 명명했으니, 억압된 감정을 배출함으로써 짓눌린 영혼이 “정화되고 가벼워지는” 상쾌한 느낌을 받게 됨을 가리킨다.
하지만 유념해야 할 한 가지. 이 굴뚝 청소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한쪽 끝에 프로이트의 ‘창조적 질병’이 있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겪었던 깊은 우울과 신경증적 고통” 속에서 인간 마음의 진리를 추적하는 자신의 작업에 몰두함으로써,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기가 “종종 급격하게 끝나며 상쾌한 들뜸 혹은 환희(phase of exhilaration)”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곤 하였다. 그는 이것을 ‘창조적 질병’이라고 불렀다(조엘 화이트북Joel Whitebook, 『프로이트 – 어느 지성의 전기』, 2017).
이때 ‘굴뚝 청소’는 ‘터널 효과’와 동의어이다. 깊은 우울과 탐구의 터널을 빠져나올 때 일종의 청량하고 고양된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편 끝에서는 ‘조울증(양극성 장애)’도 나타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유명한 사례인 ‘늑대 인간’은 “우울증 발작과 함께 상쾌하고 들뜬 고양감이 교차하는 조울증(만성 멜랑콜리) 진단을 받았다.”(엘리자베스 루디네스코Elisabeth Roudnesco, 『그의 시대와 우리 시대의 눈으로 보는 프로이트』(2014).
그러니까 김엄지식 감각의 눈뜸은 이제 막 출발점에 선 경주 선수의 기분에 해당한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촉망받았던 이 젊은 작가의 선전을 기대해보자.
구효서·소설가

♦위리
김엄지의 《위리》에는 행간이 참 많다. 소설집을 펼치면 이게 시집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행간이 많다는 것은 문장들이 짧다는 뜻도 된다. 짧은 한 문장을 한 문단으로 취급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모자라 행과 행 사이를 여타 소설집의 소설들보다 조금 더 띈다. 빈칸이 많아 보일 수밖에 없다.
빈칸이라는 말마따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것을 공백이라고도 할 수 있고 결핍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쩌면 ‘눈멂’일 수도 있다. 없고, 안 보이니까.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예술의 기원을 눈멂에 두기도 했다. 화가의 눈이 모델과 캔버스 사이를 오갈 때 짧은 시각적 단절이 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눈멂이라고 했고, 그 사이에서 그림이라는 예술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행간은 이처럼 예술 작품과 관련하여 공백과 결핍, 사이와 눈멂 같은 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단어들에 비하면 ‘체념’이라는 말은 살짝 그것들의 방계에 속할 법하지만 행간이라는 범주에서 좀처럼 배제할 수 없기도 하다.
‘체념, E는 그 단어를 떠올리자 마음이 편하다.
E는 여자 친구에게 체념하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202쪽)
체념이라는 말을 직접 쓰지 않더라도 체념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은 얼마든지 있다.
‘A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168쪽)
‘핸드폰과 지갑은 챙기지 않았다.’(170쪽)
‘A는 비 오는 거리에서 우산 없이 걸었다.’(133쪽)
‘나는 완전한 비물질이 되고 싶어.’(218쪽)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온다.’(219쪽)
김엄지의 소설에서 보이는 행과 행 사이의 오롯한 빈칸들이 이와 같은 숱한 체념의 산물 같기도 하다. 그 빈 것은 쓸쓸함과 아득함, 모호함과 무심함을 품고 기복도 요동도 없이 그저 깊은 강처럼 흐르니까.
그렇다면 이 체념이라는 것은 또 어디에서 온 것일까 궁금해지는데, 필자는 그것을 결핍의 결핍에서 온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원초적 상실이라고도 하는 정신분석학의 최초의 결핍은 어머니의 상실이고, 그 결핍이 인간으로 하여금 평생토록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시달리게 하는 원인이라고 한다. 그 결핍을 결핍할 수 있다면, 그 결핍의 상실을 체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욕망하지 않게 되는 것. 거기서 이탈하는 것. 그것을 멈추는 것. 그럼으로써 주어지는 것을 김엄지는 ‘편안함’이라고 적었다.
이 점을 김엄지는 좀 더 놀랍고 서늘하게 환기한다. 체념을 ‘멈춤’과 동격화하면서 ‘호흡(숨)’ 뒤에다 그것을 술어로 놓는다. 그러면 ‘숨을 멈춘다’가 된다. 그것도 모자라 ‘심장도 멈춰 봤어.’(183쪽)라고 한다. 죽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호흡이 멈추면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라고 써서 독자를 놀라게 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말이 더 서늘하다. ‘나를 그렇게 움켜쥐고 있던 게 내 숨이었던 거야.’
숨이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는 말이 (욕망하는) 삶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는 뜻으로 풀이될 때 저 체념과 결핍의 빈칸이 비로소 단단한 밀도를 갖고 문학적 도발을 감행한다.
호흡을 멈추자는 말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호흡을 하자’는 말로 들린다. 더는 ‘나를 그렇게 움켜쥐’지 않을 호흡. 그 다른 호흡을 ‘22세기 호흡’이라고 한다.(151쪽) 그러면서 슬며시 호흡을 ‘발화’로 바꾼다. 호흡 없는 발화가 가능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22세기 호흡 수련회’에 모인 사람들의 ‘자유발언’(155쪽)이 그것이다.
다른 호흡, 즉 22세기 호흡법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발언은 당연히 ‘다른 발화’일 수밖에 없다. 체념과 빈칸의 언어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자유롭게 랑그(langue)를 이탈한다. 개별적이고 파편적이며, 인과와 개연의 고리를 벗어난다. 일찍이 그런 발화를 이상의 <오감도>에서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특히 김엄지의 <비 오는 거리>의 호흡법도 그와 같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A는 화가 났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A는 무서웠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A는 슬펐다.’(143쪽)
그리고 ‘사회 종속 독립 영향 경향 수렴 해석 차치 누락 소외’라고 적은 이 한 줄은 글자 하나 다르지 않게 자그마치 아홉 행이나 한자리에서 반복한다.(146쪽)
체념은 외부로부터 조정되고 주입된 욕망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빈칸은 언어적 속박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김엄지의 새롭고 다른, 체념과 빈칸의 호흡법은 작가 자신에게는 편안할지 몰라도 독자에게는 낯설고 난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매끄러운 언어의 유리 경면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물색없이 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상이나 윤동주처럼 매번 오리무중인 청동거울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는 게 문학이 할 일이지 않을까.*
이승우·소설가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
김성중 소설 기획(그런 게 있다면)의 놀라운 점은 인간의 현실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어떤 힘,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역에 천착하는 데 있다. 소설의 주된 기능으로 이야기되는 현실 반영이 아니라 현실이 작동하는 원리를 탐구하려는 시도 같은 것. 그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욥의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만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대 뒤편의 ‘신과 사탄의 대화’ 같은 것을 찾아내는 데 소설적 관심을 기울인다. 가령 그는 “아까운 꿈을 내주고 세속적 행복으로 바꾸었는데 그 결과 행복해졌는가?”(「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와 같은, 파우스트 모티프를 연상시키는 질문들에 도전한다. 죽음 후에는 어떤 삶이 있는가(「유령」), “이 몸과 있을 때는 저 영혼이 그립고, 완벽한 영혼과 있을 때는 몸이 그”리운 인생의 아이러니(「새로운 남편」)를 문제 삼는다.
일상의 사실적 재현이나 감각적 묘사는 뒤로 밀려나고 꿈, 환상, 상상력이 부각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리얼리티 대신 조형감이 눈에 띄는 것도 같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물 흐르듯 쓴 이야기 소설이 아니라 정교하게 깎고 다듬고 만든 장인의 소설이라는 뜻이다. 구조도 그렇지만 문장도 그렇다. 이런 소설은 작가의 작위(作爲)가 중요한데, 그 작위를 여하히 표현하느냐에 따라 소설의 성취가 결정된다. 작가의 작위는 틀림없이 드러나야 하지만,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듯 그렇게 드러나야 한다. 관념과 의도를 표 나지 않게 드러내기 위해 작가는 노심초사한다. ‘조형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과정에 들인 수고가 소설적 긴장을 만든다.
읽은 책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그의 소설에는 독서하면서 메모를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마지널리안’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하는데, 작가야말로 그런 사람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는 자신의 소설 창작의 발상과 설계에 독서가 관여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실제로 한 소설에는 이런 식으로 책을 읽다가 한 메모로 창작의 모티프를 얻는 한 인물이 나오기도 한다. “독서를 할 때 줄을 치는 것은 책 속에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 것과 같다. (…) 이따금 화살표로 표시해 놓고 내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는데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지금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아이디어일 때도 있고, 잊고 있다 떠오른 기억일 때도 있다.”(「귤락, 혹은 귤실」) 이 문장 다음에 메모까지 추출했다면 살뜰한 독서가 된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일찍이 이 작가는 바다를 잃어버린 내륙 국가 볼리비아에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해군을 예로 들며 오늘날의 작가들이 그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국경시장』 작가의 말). 바다를 잃어버린 후에도 호수에 배를 띄우고 훈련을 하는 해군과 그 운명이 같다는 문장은 이 시대의 문학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 아니라 김성중의 문학적 선언처럼 읽혔다. 이번 소설집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에 수록된 몇 편의 소설들을 읽으며 나는 여전히 김성중이 ‘전체성의 바다를 잃어버린 시대에도 호수에 배를 띄우고 훈련을 하는’ 작가라는 걸 확인했고, 그래서 반가웠다.
김인숙·소설가

♦위리
‘위리’는 우리나라 남단 어딘가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다. 섬의 이름을 제목으로 쓰고 있는 소설집 ‘위리’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정작 소설 속 주인공은 가본 적이 없다. 휴가를 가고 싶은 참에 이런저런 곳을 검색하다 알게 된 지명에 불과하다. 섬으로 간다는 건 어떤 일일까. 우선은 바다를 건너야 할 터. 주인공은 정보를 검색한다. ‘바다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며 파고 예보는 당일에도 바뀔 수 있다’는 식의 심심한 정보에 눈이 머문다. 실은 정보를 검색하기도 전에 주인공에게 위리란 그런 곳, 그런 곳이어야 했을 터이다. 아무도, 무엇도 알 수 없는 섬. 세상의 모든 섬 중의 하나. 그러니까 모든 것들, 그저 그런 것들 중의 하나.
주인공은 카페에서 하루 종일 여자 친구와의 휴가 계획을 짠다. 그러나 정작 여자 친구는 위리에 가고 싶지 않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다. 여자 친구는 하고 싶은 것은 ‘비물질이 되는 것’ 혹은 ‘be-물질이 되는 것’. 진지하게 들을 필요는 없다. 농담 같은 얘기다. 그러나 아무도 되고 싶지 않고, 무엇도 되고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은 세상의 드문 사람 중 하나일까, 모든 사람 중의 하나일까.
김엄지의 소설에서는 의미를 찾는 것보다 행간을 찾는 것이 쉽다. 소설이 행간으로 넘친다. 툭 하면 튀어나오는 빈 줄을 사이에 두고 인물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문장을 변주하며 반복한다. 행간이 말줄임표와 암시로 쓰이는 대신 뛰어넘기로 읽히고, 그 빈 공간은 어떤 지점에서의 고착으로 읽히는 대신 시간의 흐름으로 보인다. 의미 없는 사람들의 의미 없는 일상이 숨 쉬듯이 독자들의 세계로 들어오는 이유는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흐름일 테니. 그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 별것 아닌 일들이 바로 내 삶일 테니. 그러나 그러다가 균열. 김엄지의 이번 소설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다. 소설 ‘위리’에서는 주인공이 ‘충분히 오래 머물며’ 가지도 못할 휴가 계획을 짰던 카페의 유리창이 깨진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파괴적인 우박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피할 새 없이 전면 유리에 굵은 금이 간다. 유리의 굵은 금은 순식간에 실금으로 거미줄처럼 번진다.’ ‘사람들은 카운터 너머에 서서 전면 유리의 처참함을 본다.’ ‘왜 저렇게 된 건지 Y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카페의 여주인이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을 터뜨리는 건 이 소설 속 카페의 여주인만이 아니다. 단편소설 ‘여름’에서도 우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 남자에게 가족이란, 사회란 무엇일까. 허울뿐이거나 환상에 가까운 것 아닐까?’ ‘아무튼 다 필요가 없고, 그 남자에게는 자기 자신조차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운다. 이 허무한 울음에 각별한 이유를 찾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또 묻게 된다.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이유란 게 과연 있을까.
김동식·문학평론가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
책장을 펼치고 김성중의 소설을 읽다 보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른다. 그날 아침 내 앞에 두 길이 놓여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한쪽 길을 선택했고, 다른 쪽 길은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 훗날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책장을 덮을 때가 되면, 사르트르의 말이라고도 하고 하이데거의 말이라고도 하는데,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는 유명한 말에 사로잡혀서,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 선택(Choice)의 연속이라는 해석을 음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은 선택의 과정이다. 그리고 인생의 선택 과정에서 선택되지 않고 포기되어 버린 길들(삶의 가능성들)이 있다. 역사에 가정이 없듯이 인생에서도 가정이 별다른 의미가 없겠지만, 그래도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때의 선택을 회한과 후회의 영역으로 남기지 않으면서, 내 삶에 억압된 채로 잠재되어 있었던 삶의 가능성을 되살리는, 소설적 상상력의 놀이가 어쩌면 펼쳐질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 역시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다. 주인공이 A라는 인물을 만나기로 선택하게 되면, 같은 시간대에 인물 B를 만나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기술은 포기해야 한다. 인생에 가지 않은 또는 가지 못한 길이 있다면, 소설에도 쓰지 않은 또는 쓰지 못한 글이 있는 것이다. 가지 못한 길 또는 쓰지 못한 글을 소설에서 다시 상상해 볼 수는 없을까. 김성중의 소설집 [왼손잡이는 꿈을 잘 기억한다]가 바로 이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다.
단편 [유령들]은 유령이 바라본 사후 세계에 대한 보고이다. 삶의 선택 과정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 “망자에게도 선택에 따른 결과가 있고 그에 따라 사후 세계가 달라진다는 것은 당사자가 되고서야 알았다.”(11면) 주인공은 중년 여성이며 죽어서 도서관의 유령이 되었다. 그녀는 소설책을 발간한 적이 있는 작가였다. 다만 죽기 30년 전부터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왜 30년 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던 것일까. 그녀의 말을 빌자면, 그녀의 삶이 성공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과 헤어지는 데 성공했고, 개인회생 신청에 성공했고, 암 환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 곤경에 처하는 데 줄곧 성공하다 보니, 소설 쓰기를 선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공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에서도 실패한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일이었다. 책은 그녀가 가지 못한 길 위에 남겨진 그 어떤 미련이나 회한이었다. 그래서 일생을 마친 후에 도서관으로 스며들어 도서관의 유령이 되었다.
도서관의 귀신이 되어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도서관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유령들을 만나는 일. 어떤 유령들일까. 도서관 사서였던 유령, 지독한 독자였던 유령, 책의 여백에 기록을 남기는 유령, 소설의 서술자였던 유령 등을 만난다. 그뿐일까. 끊임없이 U자 형태로 움직여 다니며 도서관 곳곳에 U자를 써 놓는 로봇 청소기, 즉 유령 작가도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모두 그녀의 삶에서 떨어져 나갔던 책 읽기와 소설 쓰기의 조각들, 즉 삶의 조각들이었다. 도서관의 유령이었던 그녀는 선택한다. 삶의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여행에 나서는, 발 없는 유령이 되기로.
도서관의 유령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삶에 대한 긍정, 삶에 대한 이중의 긍정이 아니었을까. 삶의 가능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니체가 영원회귀를 들어서 말한 바 있듯이, 매 순간 삶의 온전한 가능성은 내 삶 속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 나의 삶은 부정되지 않는다. 삶을 부정하는 삶을 다시 부정하여 삶의 긍정에 이를 수 있다. 또는 망해 버린 삶 그 자체를 긍정하고, 만약 한 번 더 그 삶을 살아야 한다면 한 번 더 삶을 긍정한다는 이중의 긍정에 도달할 수 있다.
삶의 원초적인 가능성은 매 순간 그리고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을 소설로 쓰는 일. 그 과정에서 소설의 원초적인 가능성은 매 순간 그리고 영원히 펜을 쥔 내 손을 돌아온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소설 쓰기. 김성중의 소설이 욕망하는 삶과 소설의 모습은 여기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미 한 번 읽었지만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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