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아파트 절반 이상이 은마처럼 스프링클러 없다

지난 24일 불이 나 10대 여학생이 사망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날 화재 때 이 아파트에선 화재 경보기와 소화전 등 소방 안전 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주민 증언이 나왔다. 4400여 가구(총 28동) 대단지인 은마아파트는 1979년 준공됐다. 이 때문에 시설 노후로 인한 안전 사고 우려가 계속 제기돼 왔다. 소방 전문가들은 “은마는 2030년 재건축을 앞두고 있어 사실상 ‘총체적 안전 부실’ 상태로 방치돼온 것 아닌지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문제의 화재는 24일 오전 6시 18분 이 아파트 8층에서 발생했다. 이 불로 고교 입학을 앞둔 김모(16)양이 집 베란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고 결국 숨졌다.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양 집을 포함해 이 아파트의 모든 동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화재 초기 물을 분사해 일차 진화를 하는 스프링클러가 없어 열폭주로 번지는 상황을 막지 못한 것이다. 은마아파트는 지은 지 47년 된 서울의 대표적 구축 아파트 단지다.

스프링클러가 없어 화재 초기 진화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대피라도 잘해야 한다. 하지만 화재 당시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화재 경보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경보기가 울리긴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위기 상황’이라고 감지할 수 있는 정도의 음량이 나오지 않아 대피가 늦어졌다는 것이다. 아파트 복도에 비치된 소화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숨진 김양 아버지는 “불이 났다고 소리치는 아이 엄마의 고함에 옆집에서 나와 복도에 있던 소화전을 들고 우리 집 현관문 방향으로 쐈는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했다.
불길과 연기 확산 등을 막기 위해 닫혀 있어야 할 방화문 관리도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25일 확인한 은마아파트 중앙 방화문은 전 층이 열려 있었다. 이 아파트에 30년째 거주 중인 한 주민은 “엘리베이터 앞 방화문은 통행을 위해 항상 열려 있다”고 했다.

아파트에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아 화재로 목숨을 잃는 사례는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소방청에 따르면 작년 12월 기준 전국 아파트 단지 4만9810곳 중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곳은 2만5525단지(51.2%)로 절반이 넘는다. 모텔 등 숙박 시설 실태는 더욱 심각하다. 지난해 6월 기준 전국 3만1271곳의 숙박 시설 중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곳은 4252곳(13.6%)밖에 없었다. 화재 사망자 중 상당수가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아 발생한 것으로 소방청은 보고 있다.
스프링클러가 없는 아파트가 많은 이유는 공동주택의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규정이 1990년 처음 도입됐기 때문이다. 1979년에 지어진 은마아파트는 이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지난 13일 화재로 70대 사망자 2명이 발생한 부산 해운대구 14층짜리 아파트에도 스프링클러는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 아파트도 1985년에 지어졌다. 지난 2024년 8월 투숙객 7명이 사망한 경기 부천 호텔 화재 때도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아 인명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왔다.

스프링클러가 설치됐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소방청이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19~2023년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서 스프링클러가 정상 작동한 경우는 15.6%(2만3401건 중 4656건)였다. 이영주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건물이 낡았어도 진화 설비만 잘 작동된다면 사고 위험도 훨씬 줄어드는데 ‘설마’ 하며 노후한 설비를 방치하는 아파트가 많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화재 고위험 구축 건물에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를 소급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노후 주택이라도 상수도만 연결돼 있으면 배관 공사를 통해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는 있다. 하지만 1000만~3000만원의 공사비를 부담해야 해 주민들이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스프링클러가 없는 노후 건물은 정부와 지자체 등에서 설치 비용을 일부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스프링클러 설치가 어려운 노후 아파트, 주택엔 자동확산소화기를 비치해 화재에 대비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자동확산소화기는 화염이나 고열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터져 소화약제를 분사하는 장치다. 화재 초기 단계에서 연소 확대를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배관 공사가 필요한 스프링클러 설치와 달리 자동확산소화기는 1대당 2만원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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