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에 닿는 순간, 인간은 겸허해진다

외계인이 사람들 머릿속에서 ‘가족’ ‘소유’ ‘구분’ 같은 개념을 쏙쏙 빼가며 벌어지는 철학적 난장을 그린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밤에만 활동할 수 있게 진화한 인류가 옛 모습 그대로의 인류를 지배하는 미래 디스토피아로 지금을 들여다보는 ‘태양’….
최근 수년 새 국내에서 공연해 주목받은 이 연극들의 원작자는 극작·연출가 마에카와 토모히로(前川知大·52)다. 지금 일본 연극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창작자 중 한 명인 그는 작년 요미우리 연극대상 최우수연출상을 비롯해 일본 내 연극·소설 관련 상만 스무 개쯤 받았다.

그가 쓴 연극 ‘비밀통로’(연출 민새롬·번역 이홍이)가 공연 중인 서울 놀(Nol)씨어터 대학로에서 24일 마에카와 작가를 만났다. 그는 “영화는 끊임없이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거짓을 감추려 애쓰지만, 연극은 처음부터 관객과 ‘이것은 거짓말 같은 진실’이라고 합의하면서 출발하기에 더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이면의 진실에 다가가기 훨씬 쉬워요. 무대와 객석 사이를 상상력이 잇고 결합시킬 때, 허구는 어느새 의심할 수 없는 은유가 됩니다.” 말 그대로 그의 연극은 낯설고 기묘한 설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가장 깊숙한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매력이 있다.
◇“우린 언제 완전히 죽을 수 있지?”
그가 무대 위에 구축한 세계에선 우주인이 천연덕스럽게 인간 사이를 걷고, 미스터리 사건이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폭로하며, 유령이 산 자들의 곁을 맴돈다.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SF와 호러, 오컬트로 라이브 무대를 채우는 독보적 상상력이다.
연극 ‘비밀통로’는 끝없이 통로로 이어진 방들 가운데 한곳에서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 양경원, 김선호, 김성규, 이시형, 오경주, 강승호 등 영화와 드라마로도 낯익은 배우들의 활약 속에 매진 행진을 이어가는 중이다.

자신이 누군지 잊은 두 남자는 전생의 인연을 다시 경험하는 일종의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연극 포스터엔 ‘도대체 우리는 언제 완전히 죽을 수 있는 걸까?’라고 써 있다. 무엇을 발견해야 이 반복되는 ‘인생 복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관객은 웃음과 탄식을 오가며 인과와 인연의 흐름에 함께 몸을 맡겼다가 끝내 흐느끼게 되고 만다.
‘비밀통로’는 세상은 어떤 거대한 섭리에 의해 움직이며, 인간은 그 비밀을 다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이 연극의 극적 장치와 구조를 통해 마에카와가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거대한 미지(未知)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감, 그리고 거기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겸허함이었다. 그는 “관객이 극장을 나서며 ‘조용히 놀라워 하기’를 바랐다”고 했다. “웅대한 대자연을 마주했을 때, 반대로 현미경 속 미시 세계를 들여다볼 때, 인간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압도적인 힘을 느낍니다. 문명이 아무리 발전해도 끝내 해명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경계는 존재하죠. 그 미지의 세계에 닿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겸허해질 수 있습니다.”
◇미지의 경이, 인간을 겸허하게 하는 거울

그의 연극에서 SF와 호러 요소는 인간을 비추는 가장 투명한 거울과 같다. 그가 만든 극단 이름도 ‘이키우메(イキウメ·생매장)’다. “죽은 자의 입장에서, 혹은 사회 가장자리로 내몰린 존재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유령이나 요괴, 우주인처럼 인간과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를 등장시켜 오히려 현대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어요.”
그가 말하는 겸허함은 타인을 향한 태도로 이어진다. 한계를 깨닫고 겸손해진다면 분노·원망·집착 같은 부정적 감정을 타인에 대한 즉각적인 ‘공격성’으로 표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완벽하지 않아도 감정을 관조(觀照)하는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한국 프로덕션은 올해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받은 ‘젤리피쉬’를 연출한 민새롬 연출가가 이끌고 있다. 마에카와는 “일본에서 내가 연출했을 땐 삭막한 감옥 같은 회의실이었는데, 민 연출의 무대는 밝고 도회적이며 인물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았더라”고 했다.

그는 한국 배우들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한국 배우들은 신체 ‘코어’가 튼튼하고 균형이 훌륭해요. 일어서고 걷는 기본 동작에서도 역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객석에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 서울 대학로에선 놀씨어터뿐 아니라 대학로극장 쿼드에서도 그의 작품 ‘함수 도미노’가 공연 중이다. 근래 이렇게 많은 작품이 한꺼번에 한국 무대에 오른 일본 작가는 없었다. ‘비밀통로’ 공연은 5월 3일까지, 6만6000~7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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