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 최제우 신원 회복”… 최시형, 영해서 무장봉기 일으키다
‘포항사람 해월 최시형’ 유적지 답사-정선 적조암






해월 최시형은 신미년(1871년) 3월10일 경상도 영해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동학도인들을 모아 억울하게 참형 당한 스승 수운 최제우의 신원(명예회복)과 포덕의 자유를 요구한 것이다. 이에 영해 봉기는 신미영해교조신원운동이라고도 한다. 이를 계획하고 주도한 이는 충청도 홍주(현재 홍성) 출신의 이필제란 인물이었다. 그는 진천, 남해, 진주 등지서 끊임없이 봉기를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그가 다시 찾은 고을은 한반도 동쪽 끝 경상도 영해였다. 해월은 이 무렵 스승 수운 참형이후 태백산맥 깊은 영양 일월산 자락에 은신해 있었다. 이필제는 사람을 보내 해월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 교조 수운의 신원을 끈질기게 설득한다. 그러나 해월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주저한다. 그러나 제자들마저 간청을 거듭하자 마지못해 허락한다. 영해봉기에는 주로 초기 포덕한 경상도 일대 도인들이 참가했으며 500여 인에 이르렀다.
이들은 야심한 밤을 틈타 영해읍성을 쳐들어가 영해부 전체를 장악한다. 그리고 탐학을 일삼았다는 부사 이정을 꿇어앉히고 처단한다. 창고를 열어 수탈한 돈과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준다. 그런데 상황은 이들에게 금방 불리해진다. 안동, 경주, 대구 등지서 진압 관군이 내려온 것이다. 도인들은 다시 몸을 숨겨야 했다. 해월 일행도 곧장 읍성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머물던 영양 윗대치로 향한다. 그러나 도착 이튿날 한밤중 관군이 들이닥친다. 빠져나온 도인들은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한다. 다행히 해월과 이필제, 강사원 등은 간신히 몸을 피한다. 영해 봉기가 사실상 닷 새 만에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필제도 해월과 헤어져 한참 뒤 문경에서 변란을 획책하다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된다.
영해봉기는 해월이 천신만고 포덕으로 일으킨 경상도 동학조직을 거의 궤멸시키고 만다. 도인들은 붙잡혀 처형되거나 산간오지로 숨을 만한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첫 교조신원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해월은 또 다시 관군의 추적을 받는 신세가 된다. 이어 강원도 영월, 정선 일대에서 내내 숨어 지내야 했다. 도인들의 바람이었던 스승의 신원은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교단이 뿌리 채 뽑힐 위기만 초래한 것이다. 태백산을 헤매던 해월은 영월 직동으로 와서 도인 박용걸의 집에서 겨울을 지낸다. 세상이 조용해지자 정선에서 도인들이 오갔고 해월은 정선에서 몸을 숨겨 지내게 된다. 하지만 관군의 추적은 집요하게 지속된다.
해월은 그 해 10월 보름날 제자들과 수련 기도를 결행한다. 장소는 정선군 고한읍 해발 1,200m 고지대 함백산내 작은 암자 적조암이었다. 적조암은 본절 정암사(옛 이름 갈래사)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턱 한적한 곳이었다. 해월은 임종을 앞두고 병환 중인 암주 철 수좌의 배려로 49일간 머물기로 한다. 적조암과 정암사는 산길로 2.3km 떨어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고한읍 정암사 앞으로 태백과 영월 방면 도로가 뚫려 있다. 도로는 함백산 고갯마루 만항재와 만난다. 그러나 이 일대는 해월 일행이 찾아 들었을 때는 태백산맥 깊고 깊은 산중이었다. 수련 기도에 해월과 함께 한 제자는 강수, 유인상, 전성문, 김해성 등이었다. 이들은 하루 주문 3만 독을 외우며 혹독한 수련을 한다. 숙식을 빼고는 수련에만 매달린 것이다. 기도는 12월 5일(1873년 1월3일) 끝난다. 마친 당일 날씨는 청명했지만 매우 차가웠다.
해월이 수련 기도를 마치고 읊었다는 시 한 수가 전해진다.
太白山工四十九 受我鳳八各主定
天宜峰上開花天 今日琢磨五絃琴
寂滅宮殿脫塵世 善終祈禱七七期
태백산에서 사십구일 공부를 하고
내가 봉황 여덟 마리를 받아 각각 주인을 정하니
천의봉 위에 꽃핀 한울이요,
오늘 오현금을 갈고 닦고
적멸궁전에서 티끌세상을 벗어나고
사십구일 기도를 잘 마쳤구나 (천도교 신인간)
적조암은 정암사 암자 즉 엄연한 불교사찰이었다. 하지만 주지 철 수좌는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해월에게 음식을 내놓고 동학 주문을 외우며 기도하는 것을 선뜻 허락해 준다. 철 수좌야말로 종교간 반목과 질시를 잠재워 버리는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본받을만한 점이다. 1887년 3월 해월은 제자 서인주와 또 다시 적조암을 찾는다. 또 같은 해 4월 제자 손천민도 자신의 기도처로 선택한다. 이후 적조암은 천도교단의 중요 성지가 된다. 지금도 교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871년 신미영해교조신원운동 이후 궤멸되다시피 한 동학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출발지가 된 것이다. 해월의 수련 기도는 이후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6.10만세운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Copyright © 경북도민일보 | www.hidomin.com | 바른신문, 용기있는 지방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