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카메라] 탑골 장기판 밀어내자…흩어진 노인들의 시간 따라가 보니

이상엽 기자 2026. 2. 2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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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탑골공원에서 장기판이 사라진 뒤 그 많던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서울시와 종로구청은 새로운 공간을 마련했지만 '미관상의 이유'로 밀려난 노인들은 여전히 옛 공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밀착카메라 이상엽 기자가 만났습니다.

[기자]

여행 갈 일 없는 노인은 여행 가방을 항상 들고 다닙니다.

84살 이풍규 씨, 젊은 시절 추억 때문입니다.

1970년대 아라비아 사막에서 측량 전문가로 일했습니다.

[이풍규/84세 : 밥을 먹으면 모래바람이 싹 들어와요. 겁도 없이 자동차 혼자 몰고. 그런데 모래밭에 빠졌네? 48㎞를 걸었어요.]

돈도 많이 벌고 모험도 즐겼습니다.

산업 역군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그 사막에서 봤던 신기루처럼 다 사라졌습니다.

[이풍규/84세 : 고마워요. 건빵. {어디에 자리를 잡으시게요?} 자리? 일정한 데가 없어요.]

아침이면 서울역을 출발해 종로 무료급식소에서 한 끼를 챙깁니다.

그런 뒤면 할 일이 없습니다.

이 공원 여기저기 흩어진 노인들은 비슷하고도 다른 사연을 가졌습니다.

86살 정규현 씨, 가난이 싫어 죽도록 공부했습니다.

[정규현/86세 : 공부만 해서 산다. 그것만 목표로 했지. 석사 생활 끝나고 통역장교로 들어갔어요.]

영어 소설책을 통째로 외워 대형 무역회사에도 취업했습니다.

[정규현/86세 : 면접관이 미국인이야. I am dying for a cigarette. 담배 하나 피우고 싶어 죽겠다 이거야. '그거 어디서 배웠냐' 그래서 '<전우여 잘 있거라> 346페이지에 딱 있습니다'라고.]

88살 이정림 씨, 한평생 일했는데 자식들 다 키우고 나니 혼자였습니다.

[이정림/88세 : 을지로 지하철은 내가 그걸 다 파서 굴을 만들었어. 그때 불도저를 끌고 다녔으니까. 집사람은 산지기 하러 갔지. {네?} 산지기. {산지기?} 지리산 지키러 갔어. {왜요?} 숨이 끊어졌으니까.]

이런 노인들, 이 공원에 모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료급식소에서 한 끼 해결하면 시간 보낼 곳이 필요했습니다.

이곳 장기판 앞에선 돈이 더 들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어. {뭘 또 가만히 있어 보래?} 장군 하자, 장군.]

무엇보다 자식은 뭐 하냐, 어떤 집에 사느냐, 급을 나누거나 개인사를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동네 노인회관보다 편했습니다.

[이정림/88세 : 별 늙은이 다 모이지, 뭐. 나 같이 쓸모없는 사람도 오고.]

지난해 7월 종로구청은 탑골공원 장기판을 철거했습니다.

일부 노인들이 술 먹고 더럽히고 시끄럽게 한다는 겁니다.

공원은 깨끗해졌지만 그 많던 노인들은 도시 곳곳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서울역, 청량리, 인천공항, 지하철 1호선.

어쩌면 집 안에 혼자 고립됐습니다.

[수잔 쿡/관광객 : 캐나다에서도 노인들의 사회적 고립이 이슈예요. (장기와 바둑은) 동지애와 사회적 행동을 만드는 대단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것들을 규제해야죠. 공원에서 음주라던가요. 그게 문제라면요.]

실은 우리 미래일 수 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평범했고 또 치열했던 삶을 살아온 노인들.

사람들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이들의 시간은 오늘도 이 공원에 쌓여갑니다.

[영상취재 정상원 영상편집 홍여울 취재지원 권현서 장민창 김수린 영상자막 조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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