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곡사(勿哭辭)를 남긴 백호 임제

노성태 2026. 2. 25.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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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54) 임제
백호 임제 영정

-내가 죽거든 곡(哭)하지 말라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인물 중 한 분이 26세에 요절한 읍취헌 박은(朴誾, 1479~1504)이다. 정조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시인’이라고 추앙하면서 그의 유고집인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의 서문을 써주고 간행을 명했다. 그런데 1933년 ‘조선 소설사’를 쓴 김태준은 임제를 “조선조의 천재 시인 읍취헌 박은과 병칭되는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천재는 명이 짧다는 말도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시인 박은은 26세에, 이에 비견되는 임제는 39세에 생을 마감한다.

백호 임제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황진이 무덤을 찾아 제문을 짓고 제를 올린 후 읊었다고 하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다.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그의 시, ‘말 못하고 헤어지다’라는 뜻을 지닌 ‘무어별((無語別)’도 대단하다. 그러나 역사를 하는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임제의 상징은 ‘자주정신’이 진하게 묻어있는 유언 ‘물곡사(勿哭辭)’다.
‘무어별’(無語別) 시비

‘물곡사’ 비

임제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자식들이 울자, 임제는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사이팔만 개호칭제(四夷八蠻 皆呼稱帝)/ 유독조선 입주중국(唯獨朝鮮 入主中國)/ 아생하위 아사하위(我生何爲 我死何爲)/ 물곡(勿哭)”

‘물곡사’에 나오는 ‘사이팔만’은 중국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있는 민족을 중국인들이 ‘이(夷)’와 ‘만(蠻)’, 즉 ‘오랑캐’라고 낮추어 부른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낮추어 부른 오랑캐도 다 황제라고 칭하는데, 유독 조선만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는 질타였다.

임제는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사대’를 거부했고, 조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지 않고 중국의 변방 정도로 여기고 있던 당대인들의 유약함을 꾸짖고 있다. 이런 ‘사대’하고 ‘유약’한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온 것 자체가 부끄러운데, 내가 죽는다 해서 그 죽음이 하등 슬플 것이 없으니, 내 죽더라도 울지 말라는 당부였다. ‘물곡사’의 핵심은 ‘사대’가 아닌 ‘자주’다. 임제는 ‘광인’이 아닌 당대 날카로운 시대정신의 소유자였다.

-‘중용’ 800번 읽다
‘물곡사’를 남긴 임제(林悌, 1549~1587), 1549년(명종 4), 전라도 나주목 회진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임진과 남원 윤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풍강(楓江)·백호(白湖)·벽산(碧山)·소치(嘯痴)·겸재(謙齋) 등이 있고, 본관은 나주다.

임제의 조부인 임붕은 생원 시절, 기묘사화(1519) 당시 조광조 등이 화를 입자 “유생들이 옥에 갇혔으니 신 등이 홀로 편안히 있을 수 없다”면서 성균관 학생 240여 명을 이끌고 궐문 밖에서 상소를 올린 올곧은 인물이었다. 1521년(중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호조참의와 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중부(仲父, 둘째아버지) 임복은 임제의 어릴 적 스승이었다. 임복은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지만, 이듬해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삭주에 유배된다. 양재역 벽서사건이란 1547년(명종 2)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벽서로 야기된 명종 때의 정치적 옥사를 말한다. 이 사건을 빌미로 당시 외척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윤원형 세력은 반대 세력 20여 명을 유배 보냈는데, 그 속에 임복이 있었다. 유배가 풀린 임복이 영모정에 은둔 중이던 1567년, 광주 희경루에서 증광시(1516, 명종 1) 급제 동기생인 광주목사 최응룡, 전라도 관찰사 강섬 등과 함께 한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 모습을 그린 것이 ‘희경루방회도’다.

부친 임진은 21세에 무과에 급제, 5도의 절도사와 평안 병사 등을 지낸 무인이다. 백호 임제가 문인이면서도 늘 칼을 차고 무술을 연마했던 것은 부친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리고 임제의 외손자가 숙종 대에 남인의 영수가 되어 송시열의 서인과 예송논쟁을 이끈 허목(許穆, 1595~1682)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그가 학문에 뜻을 둔 것은 20살 전후였다. 22살 나이에 만난 스승이 속리산에 은거하고 있던 대곡 성운(成運, 1497~1579)이었다. 23세에 모친상을 당해 내려왔다가 다시 속리산에 들어가 성운 밑에서 수학한다. 이때 ‘중용(中庸’)을 800번 읽었다는 일화가 있다.

1576년(선조 9)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후 이듬해인 1577년(선조 10), 문과에 급제한다. 생원·진사시 합격 1년 만에 연이은 문과 합격은 뛰어난 천재성이 없으면 드문 일이었다. 외손자인 허목의 시문집인 ‘미수기언(眉叟記言)’에는 임제의 묘갈명인 ‘임정랑묘갈문(林正郎墓碣文)’이 남아 있다. 묘갈문에 “타고난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 하루에 수천여 자를 외웠다”는 기록이 있다. 1년 만에 생원·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속세와 어울리지 못하다
1577년(선조 10), 문과 급제 후 받은 첫 관직은 정9품 승문원 정자였다. 급제 직후 제주목사였던 부친 임진에게 합격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고, 이때 4개월간 제주도 각지를 유람하고 쓴 유람기가 ‘남명소승(南冥小乘)’이다.

승문원 정자 이후 그가 받은 내직은 정5품 예조정랑 겸 국왕의 교서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인 지제교였다. 임제의 마지막 관직이 정랑이었음은 ‘예조정랑 겸 사국 지제교’에 그쳤다는 묘갈문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승문원 정자와 예조정랑을 제외하고 그는 외직으로 전전했다. 문과 급제 후 2년 뒤인 1579년(선조 12) 종6품직인 고산찰방에 임명된다. 문과 합격 당시 임제의 성적은 을과 제 2위(亞元)였다. 뛰어난 등과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문원 정자 이후 곧바로 외직 중 한직인 찰방으로 쫓겨난다. 이어, 이듬해에 받은 관직은 서북도(평안도) 병마평사(兵馬評事)였다. 병마평사는 함경도와 평안도에만 설치된 정6품 외관직이다. 우후(虞候)와 더불어 병마절도사를 도와 군자(軍資)와 고과(考課) 및 개시(開市) 등의 사무를 관장하는 직책이었지만, 무신 수령과 각급 군사 지휘관을 규찰하는 중요 목적도 있었다. 이어 해남현감, 평안도사, 흥양현감을 지냈는데, 평안도사에 부임하러 가는 길에 들른 개성에서 황진이 무덤을 찾는다.

그의 관직 생활은 10년에 그친다. 1587년(선조 2)), 3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과거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직과 한직을 전전했던 이유를 외손인 허목은 “이 때에 동서 붕당의 논의가 일어나 선비들이 다투어 명예로서 서로 추천하고 끌어주었으나, 공(임제)은 구속됨이 없어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고, 또 자신을 낮추어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라고 묘갈문에 기록하고 있다.

그가 우수한 과거시험 성적에도 불구하고 청요직에 임명되지 못했던 것은 ‘구속됨이 없었다’, ‘어느 곳(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라는 묘갈문 속에 잘 녹아 있다. 당시의 선비들은 세속과 어울리지 못했던 임제를 ‘법도를 벗어난 사람’, 심지어는 광인(狂人)으로까지 취급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이와 허균, 양사언 등은 임제의 ‘기개(氣槪)’를 인정했다.

임제가 사후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1747년(영조 23) 원경하가 호남의 형편을 영조에게 아뢰는 글에 남아 있다. “아! 기대승·김인후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고경명의 순충(純忠)·대절(大節), 이후백·박상의 문장과 정충신의 공적, 김덕령의 용기, 임형수·임제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경기도 출신인 원경하의 호남 인물평이 대단하다. 기대승과 김인후는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으로, 임형수와 임제는 씩씩하고 호방한 기상으로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물곡사’에 담긴 ‘자주정신’과 ‘호방’함, 그리고 ‘기개’는 임제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청초 우거진 골에’, ‘무어별’을 남기다
시인 임제를 대표하는 시는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읊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은 어듸 두고 백골만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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