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흔적은 아름답다…실사 영화로 돌아온 ‘초속 5센티미터’

벚꽃, 기찻길, 폭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2007)는 아름다운 단상들을 모아놓은 듯한 작품이다. 애니메이션이기에 그려낼 수 있는 총천연색의 하늘과 실사처럼 정밀한 배경 스케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하나의 서사라기보다는 남자 주인공 ‘타카키’가 유년·청소년·성인기에 지나는 어느 단락들을 무심히 잘라 보여주는 것에 가까웠다. 신카이 감독은 3부의 느슨한 에피소드 구성을 통해 이야기를 다 설명하기 보다 순간의 감정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했다.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의 실사 영화 <초속 5센티미터>는 점으로 흩어져 있던 아름다운 장면들을 한 궤의 이야기로 연결해낸다. 2008년 서른을 앞둔 타카키(마츠무라 호쿠토)는 말수 적은 직장인이다. 회사 동료 리사(키류 마이)와 연인 관계이지만, 둘 사이는 건조하다. 초등학생 때의 첫사랑 아카리(타카하타 미츠키)와 멀어진 후, 타카키는 쭉 어딘가 공허했다. 타카키와 아카리는 훗날 추억이 깃든 벚나무 아래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었다. 2009년 그 약속의 날이 다가오면서, 두 사람은 각자의 어린 날을 돌아본다. 과연 이들은 벚나무 아래에서 재회할 수 있을까.


원작은 1부에서 타카키와 아카리의 초등학생 때 약속을, 2부에서 고등학생 타카키를 짝사랑하던 카나에의 이야기를, 3부에서 성인이 된 타카키의 모습을 순행적으로 그린다. 오쿠야마 감독은 성인 타카키의 삶을 중심으로 1·2부 과거 이야기를 사이에 풀어낸다. 60분으로 짧은 원작의 2배인 122분 러닝타임의 영화는 첫사랑 아카리와 여자친구 리사 등 여자 주인공들을 생명력 있게 묘사하는 데 공을 들였다. 실사판의 이야기가 훨씬 풍부한 청춘들의 이야기로 느껴지는 이유다.
확장된 이야기 속에서, 타카키와 아카리는 서로 만날 듯 만나지 않으며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따로이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의 흔적을 느낀다. “초속 5센티미터래,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 아카리가 유년 시절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타카키가 그 말을 똑같이 하는 아이들을 보며 놀라는 식이다. 과거가 되었다고 해서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추억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오쿠야마 감독은 시대성을 잘 살린 실사화를 위해 1990~2000년대의 시대 설명과 등장인물의 연대별 상태 등을 따로 정리했다고 한다. 시기에 따라 타카키의 마음이 점차 닫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촬영 기법에 차이를 두었다. 어린 시절은 핸드 헬드로 즐거움을 담아냈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고정 카메라를 자주 사용해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했다고 한다.
원작 장면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도 놓지지 않았다. 타카키가 아카리와 뛰어놀던 길목, 카나에(모리 나나)와 자전거를 대어놓던 편의점, 설경 한가운데의 벚나무 등 작품의 배경은 애니메이션과 판박이다. 애니메이션이 형형색색이라면, 오쿠야마 감독은 디지털 촬영 후 필름 현상을 거치는 독특한 기법을 활용해 레트로한 필름 감성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흩날리던 벚꽃잎이 눈송이로 바뀌는 샷 등 실사이지만, 애니메이션 같은 낭만적인 표현도 인상적이었다.


<엣 더 벤치>(2024)로 데뷔한 오쿠야마 감독은 사진가이자 CF·뮤직비디오 감독이기도 하다. 야마자키 마사요시의 ‘원 모어 타임, 원 모어 챈스(One more time, One more chance)’의 가사를 띄워 뮤직비디오처럼 연출했던 원작처럼 실사판 사이에도 노래에 맞춘 컷 편집이 들어가는데, 뮤직비디오 연출가답게 그 배치가 감각적이다.
엔딩곡으로 삽입된 일본 가수 요네즈 켄시의 ‘1991’은 영화의 여운을 배가한다. 19991년은 극중 타카키와 아카리가 처음 만난 해이자, 요네즈 켄시의 출생 연도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를 직접 관람한 후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원작의 감성을 가져가면서도, 오쿠야마 감독의 색이 잘 드러나는 실사화 작품이다. “불완전하고 미숙한 바통을 젊은 크리에이터들에게 넘겨버린 듯한 기분에 불편하기도 했다”는 신카이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마지막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모두가 이유 없이 상처 받고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채 있는 ‘아무것도 없음’을 건져올리고 싶다는 마음에 만들었던 애니메이션이 실사화된 것을 보면서 그는 “20년 전의 서툰 씨앗이 푸르름을 머금은 채 훌륭한 결실이 되었더라”는 감상을 전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0706210923501#ENT
https://www.khan.co.kr/article/202508031020011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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