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10년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응급실 뺑뺑이 피해자

보건복지부가 지난 10일 32개 지역 의과대학의 입학 정원을 2027학년도부터 5년 동안 한시적으로 연평균 668명씩 증원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내년에는 2024·2025학번의 ‘더블링’으로 쑥대밭이 돼버린 지역 의대의 현실을 고려해 490명만 증원한다. 더욱이 늘어나는 의대 정원은 전원 성공이 불확실한 ‘지역의사제’라는 낯선 일본식 제도로 선발한다.
정은경 장관은 복지부가 내놓은 증원 계획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 “과학적인 근거와 투명하고 민주적인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결정했다는 의미가 가장 크다”고 밝혔다. 그런데 보건복지부의 증원 계획은 ‘과학적 추계’가 예상하는 2037년 의사 부족 규모 4724명의 71%를 채우는 수준일 뿐이다.
모자라는 1382명의 의사에 대한 대책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의대 증원에서 ‘과학’은 억지로 들고나온 들러리일 뿐이었다. 오히려 의대생과 전공의가 1년 7개월의 혹독한 ‘투쟁’에 지쳐버렸다는 판단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의사협회도 아쉽지만 선방(善防)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의협이 상한선이라고 밝혔던 연간 350명 증원을 넘어서기는 했지만 “490명까지는 조건부 수용이 가능하다”는 묘한 입장을 밝혔다.
더욱이 의협은 추계위와 보정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자랑하고 증원되는 인력을 10년간 지역·공공에 묶어두는 ‘지역의사제’에도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협에 대한 의료계의 눈길이 곱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 고비용의 의대 교육과 전공의 수련
실질적으로 의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상급종합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전담하는 의대 교수들의 입장은 다르다. 이미 전국의 40개 의대가 2024학번(3058명)과 2025학번(4567명)의 ‘더블링’으로 극심한 고난을 겪고 있다. 2025학년도에 1509명이 증원된 32개 지역 의대는 물론이고 요행히 폭증을 피했던 서울의 의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재 2242명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 인력과 시설을 갖추고 있는 32개 지역 의대의 의과 1학년에 6049명의 학생이 몰려 있다. 정상적인 의대 수용 인원의 2.9배에 이른다. 일부 지방 국립대의 경우에는 정상 인원의 3.5배가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의과 1학년의 강의실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라는 뜻이다. 수강생의 60%가 의과 1학년 강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더블링의 소나기를 피하고 싶었던 1586명의 휴학생이 일시적으로나마 의대의 교육 부담을 줄여주고 있는 형편이다.
의과의 교육과정은 본격적인 의학 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일부 무책임한 전문가들의 억지는 국민 기만적인 것이다. 의예과의 교육과정도 명백하게 의학 교육의 일부다. 물론 실험·실습이 크게 늘어나는 본과의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한 것은 분명하다.
의학 교육의 특성을 무시한 일부 법조계·경제 전문가들의 억지도 황당하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줘야 하는 의료 현장에서는 하급심의 오류를 바로잡아 줄 고등법원과 대법원도 없고 IMF 위기를 앞두고 ‘기초는 튼튼하다’고 국민을 기만했던 엉터리 경제전문가의 어설픈 억지도 용납하지 못한다. 부실한 의학 교육과 전공의 수련은 곧바로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 의과 1학년 학생들이 의대를 졸업하는 2031년 가을의 상황도 걱정해야 한다. 현재 48개 상급종합병원을 포함해 211개 수련병원에서 한 해에 수용할 수 있는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수는 3200명 수준이다.
현재 의과 1학년 학생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2800여 명이 전공의 수련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의사 낭인(浪人)’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는 뜻이다. 2031년의 전공의 수련 대란을 피하려면 유급생의 비율을 크게 늘려야 하는 황당한 일을 감수해야 한다.
● 의대 교수들의 절박한 요구에 귀기울여야
정부가 의대 교수들의 절박한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당장 필수의료 수가를 정상화하고 의료사고의 부담 구조를 개선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의료 전달체계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KTX가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으로 직행하는 통로가 되고 있는 현실은 절대 정상이 아니다. 전공의 수련 인프라도 확실하게 확충해야 한다.
보건복지부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해결을 시도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지난 정부의 실패한 의대 증원이라는 총선용 꼼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보건복지부의 모습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과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필요한 의대 증원보다 간병 서비스를 확대하는 대책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물론 의료계의 노력도 중요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가 세상을 바꿔놓고 있는 21세기에 중세 유럽의 낡은 ‘도제식 교육’을 고집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나는 주당 100시간도 견뎌냈다’는 식의 억지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영혼을 갈아 넣어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사회 환경에 어울리는 현실적인 ‘전공의 수련 방법론’을 찾아내야 한다.
211개 수련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전공의 수련 과정에 대한 관리·감독이 허술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수련병원을 50개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과연 우리가 매년 3000명의 ‘전문의’를 양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전공의 수련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의료 제도의 개혁은 단순한 일차 방정식이 아니다.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연립방정식을 푸는 자세가 필요하다.
좋은 ‘의료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 노력도 필요하다. 현대 의학이 놀라운 수준으로 발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환자의 모든 질병을 말끔하게 치유하는 기적의 의술이 등장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의료 소비자에게도 현대 의학과 전통 한의학의 특성과 한계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X선과 MRI 등의 첨단 진단 장비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한의사는 적극적으로 퇴출해야 한다.
“만병통치의 의술은 아무 병도 고치지 못한다”는 영국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명언을 기억해야 한다. 의료 소비자의 주머니를 노리는 얄팍한 엉터리 ‘유사(類似)의술’과 ‘쇼 닥터’를 경계하는 합리적인 자세도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 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 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3200여 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질병의 연금술》《지금 과학》을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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