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4년…러시아 투자한 韓기업 과제는[별별법]
전쟁·제재로 러시아서 서방 기업 대규모 철수
공백 틈타 일부 기업 '전시 특수'…中기업 중심 시장으로
러시아 재진출 모색 韓기업에 새로운 과제 던져
中기업과 경쟁 속 '차별화 전략'이 지속가능 성과로
[법무법인 율촌 모스크바사무소 조은진 러시아 변호사]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었고, 러시아에 투자한 한국 기업들의 경영 환경 역시 급격히 변화시켰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과 유럽연합(EU)를 중심으로 대러 제재가 본격화되자 러시아 정부는 2022년 3월 5일 제재에 동참한 국가들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다. 이 조치는 이후 외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외환 규제, 인허가 통제, 자산 처분 제한 등 각종 규제의 출발점이 됐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다수의 서방국 기업들은 러시아 시장에서 빠르게 발을 뺐다. 서방국의 강도 높은 제재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대거 러시아 사업을 철수했고 한국 기업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현대차는 러시아 공장을 매각하며 사실상 시장에서 철수했고,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임시 철수’ 전략을 택했다. 전쟁과 제재라는 외부 환경 속에서 대기업들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모든 한국 기업이 러시아 시장을 떠난 것은 아니다. 롯데, 팔도, 오리온을 비롯한 일부 소비재 기업들은 러시아에 남아 현지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식품과 소비재 분야에서는 현지 생산과 유통망을 유지한 기업들이 전쟁 이후에도 시장 내 존재감을 유지해 왔다.
다수의 서방 기업이 철수하면서 러시아 시장에는 예상보다 큰 공백이 발생했다. 자동차 완성차 시장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자동차 부품과 타이어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유지됐고, 의료기기와 화장품, 식품과 같은 생활 필수재 시장 역시 급격히 위축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 남아 있던 한국의 자동차 부품, 타이어, 의료기기, 화장품 기업들이 서방 기업의 빈자리를 메우는 현상이 나타났고 일부 기업의 경우 기존 대비 매출이 5~6배가량 증가하는 이른바 ‘전시 특수’가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성과는 러시아에 남아 있는 모든 기업에 공통된 것은 아니며 시장 재편을 예상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한 기업에 국한된 결과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에 남아 있는 기업들은 결제와 자금 회수, 물류와 보험, 그리고 규제 리스크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SWIFT 제한과 국제 결제망 붕괴로 인해 대금을 받는 것보다 이를 본국으로 송금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고, 선박·보험·재보험이 제재 대상이 되면서 물류 자체가 거래의 병목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 규제기관이 비우호국 기업을 대상으로 형식적이거나 과도한 사유를 들어 벌금이나 과징금을 부과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기업들은 “러시아에서는 법으로 다퉈봐야 소용없다”는 인식 아래 규제기관의 보복을 우려해 부당하다고 느끼는 처분에도 문제 제기 없이 비용을 감수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소극적 대응이 항상 최선의 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의료기기 기업 오스템임플란트의 사례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오스템임플란트는 러시아 관세청이 부과한 관세가 법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부당한 처분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러시아 법원은 관세청의 처분이 위법하다고 보아 오스템 측 주장을 인용했으며, 그 결과 오스템임플란트는 러시아 연방 국고에 납부했던 관세 126억원 전액을 환급 받았을 뿐 아니라 해당 자금에 대한 이자 33억원 청구에서도 1심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 사례는 전쟁과 비우호국 지정이라는 특수한 정세 속에서도 사안의 성격에 따라 러시아 사법제도를 통한 실질적 구제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한편 전시 특수 국면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현재 러시아 시장의 상당 부분은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장악하고 있으며, 자동차, 전자, 기계, 소비재 전반에 걸쳐 중국 기업의 존재감이 압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서방 기업들이 철수하며 남긴 공백을 가장 조직적이고 공격적으로 메운 주체가 중국 기업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변화는 향후 러시아 시장 재진출을 모색하는 한국 기업을 포함한 서방국 기업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이제 문제는 단순히 “러시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미 자리를 잡은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다. 가격 경쟁력, 현지화 수준, 공급망 안정성, 그리고 규제 환경에 대한 이해까지 종합적으로 갖추지 않으면 재진출 이후에도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시장은 세 단계의 변화를 거쳤다. 전쟁과 제재로 인한 서방 기업의 대규모 철수, 그 공백을 활용한 일부 기업의 전시 특수,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중국 기업 중심의 시장 재편이다. 앞으로 러시아 시장에 남아 있거나 재진출을 고려하는 한국 기업들은 이 세 번째 국면을 전제로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환경 속에서도 전략적으로 움직인 기업에게 기회가 열렸던 것처럼 향후에는 중국 기업과의 경쟁 구도 속에서 차별화된 전략을 마련한 기업만이 러시아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남궁민관 (kunggija@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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