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이별이란 말은 없는 거야, 영화 ‘햄넷’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89번째 레터는 25일 개봉하는 영화 ‘햄넷’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봤거나, 잃어서 앓고 있거나, 잃을지 몰라 두려워하는 모든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셰익스피어가 아들 햄넷을 기리기 위해 ‘햄릿’을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기자 양반, 댓바람에 스포아니요, 라고 하실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의 뛰어난 점입니다. 줄거리를 보여주고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고 체화하는 영화입니다. 저희 지면 기사로도 쓰긴 했는데, 좀 더 많은 분들께 전해드리고 싶어 레터로도 보내드려요. 아무래도 신문 기사는 신문에 맞는 형식이 있다보니 레터 독자분들껜 살짝 다른 내용을 붙여봤습니다.

설 직전에 영화 ‘햄넷’을 언론 시사로 처음 보고 일어서며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에겐, 이제야 그 사람을 보내주는 영화가 될 수도 있겠구나.” 이제야, 이제야. 끝끝내 보내주진 못해도 멍울이 조금은 풀릴 수는 있겠구나. 그래서 배급사에 부탁해 다음날 한 번 더 보고, 며칠 마음에 넣어뒀습니다. ‘햄넷’과 같은 날 ‘센티멘탈 밸류’ 시사회를 연이어 했는데, 끝나고 나서 탈진하다시피 했어요.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는 게 새삼스러운 게 아닌데, 두 편 다 보는 사람을 흔들어놓거든요. 대문자T형 인간(MBTI가 다 맞진 않지만, 대체적인 성향은 나뉜다는 전제에서)인지라 한 달치 분량의 감정을 그날 두 영화에 다 빼앗긴 느낌이었습니다. 대문자 F들이 지배하는 영화판, 꽁꽁 묶인 T는 도리없이 항복. 불만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햄넷’이 일으킨 진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겪어보시면 제 말을 이해하지 않으실지.
원작 소설에서 출발했는데, 한 줄의 역사적 팩트가 출발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이 11세로 사망했다.’ 셰익스피어의 생애는 알려진 부분이 매우 적어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지점이 많은데, 사망 원인은 흑사병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영화는 셰익스피어가 비극 ‘햄릿’을 아들 햄넷을 기리기 위해 썼다고 들려줍니다. 이것 역시 확인된 팩트는 아니지만, 영화가 그래서 좋잖아요. 상상력을 붙여서 이야기로 보여주니까요. 실제로 16세기말에 햄넷과 햄릿은 혼용되었다고 하고, 그 사실을 알리는 자막이 ‘햄넷’의 오프닝입니다.

‘햄넷’은 분명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 말을 유능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하고 싶은 말’ ‘유능’은 제가 영화를 판단할 때 중요하게 보는 포인트인데요,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감독 본인도 모르는 영화, 혹은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그 말을 영화로 보여줄 능력이 없는 영화가 너무 많거든요. (예를 들면 지금 개봉 중인 영화 ‘귀신 부르는 앱: 영’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공포영화를 좋아하신다고 해도, 이 영화는 티켓값이 아까우실 수 있습니다.) ‘햄넷’을 구조상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봤을 때, 전반부에서 제시했던 실마리가 후반부에서 ‘하고 싶은 말’과 완벽하게 조응합니다.
이를테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설화가 그렇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자궁에 안긴 아기처럼 커다란 숲에 한 여자가 안겨있습니다. 나무 아래 누운 여자, 그녀가 주인공 아녜스(제시 버클리)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아내 이름은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로 알려져 있는데, 아녜스(Agnes)라는 설도 있어서, 작가가 후자를 택했습니다. (배우 앤 해서웨이 이름이 셰익스피어 아내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거라고 하죠. 어머니가 문학적인 분이셨대요.) 아녜스는 라틴어를 가르치던 윌(폴 메스칼)을 만나고(윌이 그녀를 창 너머로 발견합니다), 사랑에 빠집니다. 숲에서 둘이 데이트할 때, 윌이 말해요. “사람들과 말하는 게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러자 아녜스가 권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해봐요.” “무슨 이야기를 좋아해요?” “당신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요.”
이때 셰익스피어가 해준 이야기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입니다. 죽은 아내를 이승으로 데려오기 위해 저승을 찾아간 남자, 하데스를 설득해 그녀를 데려오려다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봐 다시 그녀를 잃는 남자. 이번엔 영원히. 결국 뒤돌아본 오르페우스에게 남은 건 검은 침묵뿐. “남은 것은 침묵이었다(And the rest is silence).” 이야기를 듣고 아녜스는 미소짓습니다. “좋은 이야기네요.” 그녀를 사로잡았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 “And the rest is silence”라는 문구는 예언처럼 셰익스피어의 인생에 다시 등장합니다. 물론 ‘햄릿’에도요. 그 때 좀 다른 얘길했더라면. 자식을 열 명쯤 주렁주렁 낳고, 모두가 천년만년 장수하는 이야기 같은 거. 그랬다면 ‘햄릿’이 나오지 않았거나, 달라졌을까요.

아녜스는 숲이나 자연과 교감하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마녀로 불리고 이방인으로 배척받는데, 중국계 미국인으로 살아온 클로이 자오 감독의 자아가 어느 정도 들어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소설에는 작가의 일부가,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일부가 들어가게 마련이니까요. 육감이 뛰어난 아녜스는 남편 윌이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답답해하는 걸 너무나 잘 이해해줍니다.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븐 그때는 더 시골이었겠죠.
런던으로 남편을 보내준 아녜스, 아들 햄넷도 아빠와 떨어져 살아야 합니다. 부자(父子)가 헤어질 때 아빠가 말합니다. “용감하게 지낼 수 있지?(Will you be brave?)” “네, 용감하게 지낼게요.(Yes, I will be brave.)” 엄마와 동생을 지켜주라며 건넨 인사말이었는데, 그렇게 슬픈 말이 될 줄이야. 나중에 아들 햄넷이 어떤 대목에서 “아빠, 나 용감할게요.”라고 말하는지 영화를 보고 직접 느껴보시길. 앞서 보낸 자식이 있건없건 불가항력의 이별 앞에 인간이란 철저하게 무력하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나봅니다.
‘햄릿’은 안 읽어봤어도 모두가 아는 대사 ‘사느냐 죽느냐’가 ‘햄넷’에도 나오는데, ‘햄릿’에서보다 이 영화에서 더 절절합니다. 죽을까 말까 결정장애인 덴마크 왕자보다 자식 잃고 삶의 의미도 잃은 아버지가 말할 때 더 아프게 다가와서인지. 레터 제목을 ‘이별이란 말은 없는거야’(이 노래 아시는 분 계시려나요)라고 적었는데, 사랑과 죽음 역시 하나로 이어지는 ‘햄넷’의 이야기에 치유되는 느낌을 받으실 분이 적지 않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아마도 엔딩신. 역시 직접 보시고 느끼셔야 되는 장면이라 자세하게는 적지 않을게요. 레터가 너무 길어지려하네요. 지면에 나간 리뷰 링크를 붙여보며, 서둘러 마무리합니다. 👉24일자 조선일보 문화면 ‘햄넷’ 리뷰 기사는 여기. 그럼,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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