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원교근공…美에 손짓하는 러시아

이승우 2026. 2. 2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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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경제속국 전락 위기 러시아, 종전 카드로 '달러망 복귀' 검토
최대목표가 中 견제인 美에도 장기적 이득…걸림돌은 유럽 반대와 中 방해
美 주도 금융무역 네트워크에 러 복귀 시 국제 질서 대전환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원교근공(遠交近攻)은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중국 전국시대부터 쓰인 외교 원칙의 고전이다. 실제로 이는 현대 지정학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불변의 진리다. 국경을 맞댄 가까운 나라일수록 가장 큰 위협이자 숙적일 수밖에 없다. 언제나 핵심 이익이 겹치는 데다,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영원히 서로 영토를 뺏고 빼앗는 제로섬 게임을 해야 하는 관계여서다.

트럼프와 푸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우)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최근 러시아 행보가 심상찮은 건 원교근공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가 '달러 결제 시스템'(SWIFT) 복귀를 타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끝없는 소모전에서 발 빼고 싶은 러시아가 종전 협상을 위한 핵심 제안에 달러 결제 재개를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러시아가 '탈달러' 정책을 뒤집고 다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경제 시스템에 복귀하겠다는 뜻이자 중국과 관계도 재정립하겠다는 의도여서 파장이 크다.

실현된다면 러시아는 미국과 우방의 경제 제재로부터 자연스레 벗어날 뿐 아니라 루블화 가치 변동성을 줄여 외환 시장과 국제수지가 정상화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지경학적 안보 관점에선 더 큰 그림이 보인다. 탈달러와 서방의 경제 봉쇄에 타격을 본 이후 러시아는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 구조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경제의 중국 의존도는 현재 과도함을 넘어 종속을 우려할 정도여서 '헤징'(위험 분산)이 필요하다.

앞서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서방의 제재가 시작되자 달러망 퇴출 공포에 자발적으로 탈달러화를 시작했으나 중국 위안화 결제 비율은 미미했다. 하지만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SWIFT에서 퇴출당한 뒤엔 위안화 비중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지금은 양자 간 외환 거래의 대부분이 위안화 거래이며 전체 외환 시장에서도 30~40%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과 러시아에 걸친 거대한 '위안화 블록'이 완성된 셈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경제 제재로 달러와 유로를 못 쓰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세계 2위 경제 대국 중국의 통화였기 때문이다. 강대국 간 손을 잡으면 미국 달러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는 정치적 의도도 작용했다.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 등을 팔고 위안화를 받아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부품, 생필품 등을 사 오는 구조가 이어졌다. 하지만 야심 찬 청사진과 달리 현실은 냉혹했다. 이런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 장기화하자 러시아는 '위안화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위안화는 중국 물건을 살 때 외에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물건값을 올리거나 수출을 제한하더라도 러시아는 대응할 수단이 없다. 가격 결정권과 상품 독점 공급권을 쥐게 된 중국은 러시아를 '원자재 하청 기지'처럼 다루는 경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2차 제재를 두려워한 중국 은행들이 실제 눈치를 보느라 결제를 지연하는 사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러시아 경제 전체가 중국에 종속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아시아 패권을 넘겨주는 걸 넘어 국가 안보가 흔들리는 문제였다. 러시아의 달러망 복귀 복안에는 눈앞의 늑대보다 바다 건너 독수리가 덜 위험하다는 냉정하고 현실적 판단이 작용한다. 미국 입장에서도 달러 패권 안으로 러시아를 다시 끌어들이는 것은 중국과 헤게모니 쟁탈 경쟁에서 매우 유리한 변화다. 탈달러화 바람과 중-러 밀착을 차단할 결정적 카드여서다.

물론 미국과 러시아가 합의하더라도 러시아의 달러 결제망 복귀까지는 걸림돌이 많다. 일단 유럽연합(EU)으로부터 동의받아야 하는데, 현재 유럽 우방들은 러시아의 SWIFT 복귀와 대규모 제재 해제에 부정적이다. 러시아가 미국이 판을 짠 경제 체제로 복귀하려는 과정에서 대중국 의존도를 서방이 원하는 만큼 빠르게 낮출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중국의 반발과 방해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며, 미국 내에서도 러시아 제재 해제에 부정적 여론이 일 수 있다.

러시화 루블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배포 DB 금지]

하지만 이 모든 난관에도 결국 러시아가 미국 쪽으로 다가가며 중국과 멀어지는 선택을 할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다. 원교근공의 원리에 더해 러시아가 미국식 경제 질서로 돌아오는 것이 미·러 양국 모두에 유리하다는 더 큰 원칙적 공감대가 있어서다. 현시점에서 미국은 중국 고립이, 러시아는 중국 종속 탈피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 상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더 끌어가기엔 당사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도 여력이 거의 없다는 점도 근거다. 종전을 위한 핵심 협상안인 러시아의 달러망 복귀에 유럽이 반대할 경우 미국은 전쟁 지원을 일절 끊겠다며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입장에선 중국에 대한 배신감도 작지 않다. 손잡고 탈달러 위안화 블록을 꾸렸는데, 미국의 2차 제재 위협에 중국이 결제와 송금을 중단하면서 러시아는 생산 시설이 멈추는 등 실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주의 동지인 줄 알았는데 믿을 수 없는 이웃의 면모가 드러난 셈이다. 사실 중국 역시 전체 교역량의 70% 이상이 미국·유럽을 상대로 한 것이어서, 미국의 압박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만든 무역·금융 시스템에서 급성장했고 지금도 과실을 누리고 있으니, 위안화 블록은 논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결국 연내에 러·우 전쟁을 끝내는 대가로 대러 제재가 일부 완화되는 동시에 러시아의 달러 시스템 복귀 범위를 조금씩 늘려가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적절하다는 데 무게를 싣는다. 즉 제한적 달러 결제를 허용하고 일부 제재를 풀어주는 것으로 시작해 러시아를 세계 금융·무역망과 서양의 일원으로 천천히 점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만일 이런 '빅딜'이 성공한다면 신냉전으로 치닫는 세계 질서에 지정학적 대전환이 벌어질 전망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세력 약화는 현재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 공통의 핵심 이익이라는 점이 관전 포인트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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