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반대론자’가 바꾼 동물원…공존하는사회를 꿈꾸다 [전원생활 I 무늬가 있는 삶 ]

김난 기자 2026. 2.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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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동물원 수의사 김정호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2월호 기사입니다.

동물원에 있지만 동물원 반대론자였던 사람. 동물원의 역할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 동물을 위하는 일이 결국은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 충북 청주동물원에서 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김정호 수의사다.

“인터뷰 시간을 조금만 미룰 수 있을까요? 동물한테 문제가 생겨서요.”

청주동물원 입구에 들어설 즈음 김정호 수의사(51)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잠시 동물원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낸 뒤 사무실로 들어서 인사를 나눈 순간,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음을 느꼈다. 왠지 그가 늦은 이유와 관련이 있을 듯했다.

“2006년 여기서 태어난 호랑이 이호가 조금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동물의 시간은 인간보다 빨리 가잖아요. 이런 일이 있을 수밖에 없죠.”

덤덤한 말투와 달리 그의 표정에 슬픔이 어렸다. 동물을 치료하고 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과 이별을 감내하는 것도 동물원 수의사의 몫이다.

이동 진료소 기능을 하는 트레일러 앞에 서 있는 김정호 수의사. 트레일러를 활용해 동물원 밖 동물들을 치료하는 데 나설 예정이다.

그는 동물원의 현실을 알리는 데 주저함이 없는 수의사다. 직접 출연한 독립영화 <동물, 원>(2019년작)은 아픈 동물들의 생과 사가 오가는 동물원의 뒷공간을 보여준다. 또 다른 독립영화 <생츄어리>(2024년작)는 청주동물원을 생츄어리(Sanctuary, 착취당하거나 상처 입은 동물을 구조해 보호하는 시설)로 바꿔나가기 위한 그와 동료들의 노력, 안락사와 관련한 현장의 고민을 조명한다.

올 1월에는 에세이 <아프다고 말해주면 좋겠어>를 출간했다. 책에는 동물원이 싫다던 수의사가 20년 넘게 동물원에 머물며 이뤄낸 변화와 그 과정에서 만난 동물들의 이야기, 인간과 동물의 공존에 관한 생각이 담겼다.

그는 동물원 밖에서도 바쁜 수의사다. 도움이 필요한 야생동물이 있다면 주저 없이 달려간다. 그의 경험과 지식을 나눠야 하는 곳에서는 열정적인 강의도 펼친다. 최근 책을 출간하면서 동물복지 등을 주제로 대중과 소통하는 일도 잦아졌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지만 그는 지치는 법이 없다. 노력의 결과가 어디를 향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서일까.

‘동물원 반대론자’가 바꾼 동물원 풍경
충북대학교 수의학과 재학 시절, 동기들 대부분이 반려동물 수의사가 되겠다 했을 때 그는 다른 꿈을 품었다. 야생동물 수의사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덕분에 야생동물이 친숙했고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본 멋진 초원의 풍경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현실에 그런 직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까운 선택지가 동물원 수의사였다.

그는 2001년 청주동물원에 입사했다. 청주동물원은 청주시가 1997년 문을 연 시립동물원이다. 입사 초 그가 마주한 현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의 연속이었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는 전국에서 가장 좁은 호랑이 사육장에서 빛을 잃어갔다. 다른 동물들도 좁디좁은 콘크리트 감옥에서 매일을 버티듯 살아냈다.

예쁜 암수 한 쌍으로 보이도록 스라소니와 호랑이를 합사시키는 비상식적인 일도 벌어졌다. 제한된 공간에서 극도의 스트레스가 쌓인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했고, 싸움 끝에 폐사했다. 이 모든 상황이 그를 ‘동물원 반대론자’로 만들었다.

“그때의 동물원은 동물을 생명이 아닌 전시 상품으로 여겼어요. 최대한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하고, 멋있어 보이게 한 거죠. 동물들이 계속 다치고 아픈 이유도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런 환경 탓이었어요. 환경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예요.”

그는 2017년 진료와 사육을 아우르는 진료사육팀의 팀장이 되면서 그동안 품어왔던 생각들을 하나씩 실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동물사마다 방사장에서 내실로 통하는 문이 늘 열려 있다는 점이다. 동물이 언제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게 됐다.

김정호 수의사가 강원도의 한 사육곰 농장에서 웅담 채취용 반달가슴곰을 구조하고 있다.(김정호 수의사 제공)

새들의 스트레스 원인이 되던 물새장 내부 관람로도 폐쇄됐다. 대신 인근 전망대에 망원경이 설치돼 물새장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동물이 자연 감소하면 같은 종으로 대체하지 않고, 빈 공간은 기존 동물의 거처를 넓히는 데 쓴다. 

덕분에 청주동물원은 관람객들에게 불친절한 동물원이 됐지만 동물들의 표정은 전보다 한결 편안해졌다. 다행히 관람객들은 동물원의 변화와 그 취지를 이해했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렇게 해도 동물들 입장에선 갇혀 있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어요. 살아 있는 동안 그 안에서 최소한의 선택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자는 거죠.”

동물을 돌보는 일은 동물들이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돌본다는 것은 개체별 특성을 이해하고 필요한 것을 해주며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론 부족하다. 많은 애를 써야 하고, 기쁨은 잠깐이며, 오래 슬프고 종종 그립다.(<아프다고 말해주면 좋겠어> 중)

보호소나 치료소가 돼야 하는 이유
청주동물원에는 코끼리나 기린 같은 화려한 열대 동물이 없다. 그 자리는 야생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토종 동물들, 장애가 있거나 늙어서 갈 곳 없는 동물들이 채우고 있다. 2018년 강원도의 한 사육곰 농장에서 구조된 웅담 채취용 반달가슴곰 사례가 대표적이다.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케이지를 살아서 나온 곰들과, 이들을 구조한 수의사, 새 보금자리를 제공한 청주동물원 모두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김정호 수의사가 ‘갈비사자’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23년, 한 실내 동물원에 7년간 갇혀 지내다 갈비뼈가 앙상한 모습으로 구조된 ‘갈비사자’도 있다. 사람으로 치면 100세가 넘은 노령의 사자는 김정호 수의사의 진두지휘 아래 무사히 청주동물원으로 옮겨졌다. 이 무렵 그에게는 ‘수의사계의 이국종’이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부리가 비뚤어져 아사 직전 발견된 독수리 ‘하나’, 농장에서 탈출해 안락사 위기에 처했던 붉은여우 ‘김서방’ 등 사연 있는 동물들이 청주동물원에서 평온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 같은 풍경은 동물원의 방향성에 대한 그의 오랜 고민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언젠가 동물원이 없어지면 좋겠지만 당장은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존재해야 한다면 아픈 동물들의 보호소나 치료소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동물원의 방향성은 그가 평소에 중요하게 생각해온 동물원의 교육적 기능과도 맞닿아 있다.

“보통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동물원을 찾지 않아요. 기존 동물원이 잠깐의 즐거움을 주는 전시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동물원이 생명의 가치나 생물 다양성, 동물복지를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면 사람들이 다시 찾게 될 거예요. 그러면 야생동물과 공존을 향한 생각이 싹트는 기회도 많아지지 않을까요.”

그는 교육 기능과 함께 동물원의 주요 역할 중 하나로 거론되는 종(種) 보전 기능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종 보전은 야생동물이 원래의 서식지로 나가야 진정한 의미를 갖는데 실제 거기까지 진행하는 동물원은 거의 없어요. 내부에서 멸종위기종을 증식만 하는 거예요. 그건 엄밀히 말해 전시 동물 생산업이죠.”

동물이 행복한 세상이 의미하는 것
청주동물원의 선한 일들이 알려지면서 긍정적인 변화들이 잇따랐다. 여러 국가사업의 대상 기관으로 선정돼 동물사의 환경이 개선되고 동물의 치료와 재활, 야생 적응 훈련에 필요한 시설들이 들어섰다. 

그중 하나가 외과수술과 건강검진을 수행하는 야생동물보전센터다. 웬만한 종합병원 수술실 못지않다. 수술대부터 고가의 복강경 수술 장비, 수술용 엑스레이 영상 장비, 마취기까지 갖춰져 있다. 마취와 산과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그에겐 이 공간이 더욱 특별하다.

얼마 전에는 이동식 진료소인 트레일러도 마련했다. 동물원 밖 동물들을 치료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최근 트레일러 운전면허까지 취득했다는 그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하다.

문득 그에게 조금 미안해지는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사람 살기도 버거운 세상에, 굳이 동물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동물을 대하는 온정과 사람을 대하는 온정이 따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동물을 배려하고 챙기는 사회라면 사람은 더 존중받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봐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지 않나요? 제가 동물을 위해 하는 일도 사실은 저를 위해서예요. 동물이 대우받고 존중받으면 저의 일이 근사해지잖아요.”

결국은 사람을 위한 일이라는 그의 논리에 선뜻 고개가 끄덕여진다. 동물과 관련한 일 외에 관심사가 있는지도 물었다. 수의사가 아닌 사람 김정호가 궁금해서다.

“특별히 없어요. 저는 ‘덕업일치’의 삶을 이룬 것 같아요. 퇴직 후에도 아픈 동물을 치료해주는 일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의 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좋아하는 일과 직업이 일치하는 삶이라니. 그 어려운 걸 이뤄낸 사람의 힘 있는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어쩌면 그는 몇 년 후 대학 시절의 꿈을 이룰지도 모르겠다.

‘동물원 수의사 김정호’가 아닌 ‘야생동물 수의사 김정호’가 새겨진 명함을 들고.

김난 기자 I 사진 임승수(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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