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우러 13살에 출가…‘화엄경’의 바다에 닿다

쌀랑쌀랑 싸락눈이 내리던 날 아침, 그는 전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좁은 길, 찬 바람이 지나간다. 눈 알갱이들이 바람 따라 쓸려 다니고 있다. 겨울 숲에는 새들도 없고, 계곡은 반쯤 얼었는지 물소리도 없다. 저 오대천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조양강으로 흘러 남한강으로 갔다가 서울로 간다. 옷가지와 떡이 든 보자기 하나 들고, 그는 물길을 거슬러 산으로 가고 있다. 길은 늘 두 갈래, 가는 길과 가지 않는 길로 나뉜다. 등 뒤로 가지 않는 길이 어디에 닿는지는 모를 일이로되, 가는 길은 외길이다. 집을 나서 몇번이고 돌아볼 때까지 어머니는 사립문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1965년 겨울 소년, 출가하는 길이다. 새끼 새가 날기를 학습하여 둥지 떠나는 것을 이소(離巢)라 한다. 열세살이면 혼자 날 수는 있는 나이인지, 어미 새의 한숨 소리가 깊다.
윤창화, 1952년 강원도 강릉 태생이다. 창화(暢和)는 법명이고, 속명은 재승이다. 불교책을 전문으로 내는 도서 출판 ‘민족사’ 대표다. 아버지는 목수였다. 오대산 월정사는 한국전쟁 당시 우리 손으로 태워버린 절이다. 1·4 후퇴하면서 국군이 불 질러 신라 동종도 녹아내리고, 9층 석탑 하나, 정답게 웃는 보살좌상 하나 남았다. 월정사 소각하고 위에 상원사 태우러 갔다가 한암 스님이 “어차피 다비할 몸, 나도 태워라” 하고 법당에 좌정하니, 국군 중위가 차마 그러지 못하고 문짝을 태워 연기만 피우고 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전쟁 끝나고 월정사를 대대적으로 복원할 때 아버지는 목수로 일했다. 6남매 일가족이 사하촌에 살다가 눌러앉았다. 장남만 강릉으로 중학교를 보냈고, 그는 초등학교 마치고 잡일을 했다. 1년쯤 지났을 때 어머니가 절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 하신다. 월정사에 탄허 스님이라고 큰 스님이 계시니 가서 한문이라도 배워야 하지 않겠냐, 하신다. 저 물길 따라 서울 가서 기술이라도 배울까, 여기서 어찌 벗어날까 하던 차에, 그는 그 길로 입산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하고, 아침 공양 준비하고, 아침 공양으로 잣죽을 쑬 때는 하나가 불을 때고 둘은 부뚜막에 올라 솥뚜껑 열고 번갈아 젓는다. 채공간에 앉아 설거지하고, 독경하고, 절 마당 한번 쓸고, 아침에 부처님 앞에 올리는 밥인 사시마지 올리고, 산에 가서 나무 한짐 해다 부리고, 독경하고, 저녁 공양 불 때고, 솥에 눌린 것 숭늉 우리고, 저녁 예불하고, 독경하고, 그러고 밤 9시에 행자 방에 돌아오면 나무둥치처럼 쓰러져 잠든다. 머슴보다 힘든 것이 행자다. 보통 행자 1년 넘으면 계를 받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 그는 행자를 3년 했다. 16살에 주지 만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월정사 법맥이 경허-한암-탄허-만화로 내려온다. 그는 만화의 상좌, 탄허의 손상좌여서 조부로부터 법명 ‘창화’를 받고, 가사 장삼을 입었다. 첫 소임이 탄허 스님 시봉, 어머니의 발원은 그렇게 한 매듭을 지었다.
“노사로부터 ‘서장’(書狀)을 배웠어요. 송나라 대혜 선사의 서간인데, 승려의 교육과정인 ‘이력’(履歷)에 포함된 기초 교본이지요. 밟아온 내력이라는 뜻의 ‘이력서’가 거기서 나온 말이고요. 매일 7~10줄을 배웠는데 그날그날 배운 것을 외우지 못하면 절대 가르쳐주지 않아요. 철저한 암기 방식입니다. 먼저 큰절하고 무릎 꿇고 전날 배운 것을 눈감고 읊어야 뒷장으로 넘어갑니다. 외우다 막히면 절하고 물러 나옵니다. 그런 날은 노스승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이 무렵 탄허 스님은 ‘신화엄경합론’을 탈고한 상태였다. 이 원고는 탄허가 오대산 수도원에서 1956년 시작하여 현토 역해를 마친 1966년까지 10년간 집필한 것이다. ‘화엄경’ 80권, 이통현의 해설 ‘화엄론’ 40권은 완역했고, 청량국사 징관의 ‘화엄경 소초’는 150권 중 80%를 번역했다. 하루 14시간씩 매달려 오른팔에 마비 증세가 왔다고 한다. 육필 원고가 200자 원고지로 6만2500장에 달한다. 훗날 책으로 엮으니 500쪽 47권이다. 10권짜리 대하소설 원고가 대략 1만5000매 전후라, 조정래 대하소설 3종 세트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합친 것보다 많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화엄학의 집대성이다. 탄허는 22살, 한암을 은사로 상원사에 입산하기 전에, 간재학파 전우(田愚)를 사사하여 일찍이 경학과 노장을 공부한 유생 출신이다. 이 방대한 저작은 ‘유불선 삼교회통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찬을 받았다.
“그 작업을 위해 부산 삼덕사로 옮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절이 아니라 출판사였어요. 일단 원고는 나왔으니 교열 봐야지요. 교열팀에는 대강백(大講伯) 각성 무비 통광 스님, 비구니 자민 성일 스님과 재가자 김상숙씨 등 쟁쟁한 분들이 합류했습니다. 간간이 탄허 스님 특강이 이루어지고요, 교열 기간만 1년입니다. 저는 시봉하고 심부름했습니다만, 아름다운 광경이었지요. 원문과 번역문 대조하고 틀린 것 잡아내고, 역해에 이의를 제기하여 토론하고 수정하고, 문자 삼매(三昧)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책은 손에 쥘 때보다 손에 쥐기까지가 더 향기로운 시간이라는 한 깨달음을 얻었지요.”
창화 스무살, 해인사 강원에 입학했다. 이미 불서 몇권을 통으로 외우고, 지눌의 ‘절요’를 배우다 들어간 참이라 상반인 ‘능엄경 반’에 배정됐다.
“당시 해인사는 어마어마했어요. 강원에 학인이 80명이 넘어요. 선원 수좌가 50여명에 이르고, 승려 200여명이 상주한 최대 가람이었지요. 월정사가 읍면이라면 여기가 ‘명동’이구나 싶더라고요. 방장에 성철, 주지에 지관, 강주는 종진 스님이었어요. 종진 스님은 상경하면 꼭 출판사에 들르곤 하셨는데…. 아마 그때가 근래 우리 불교의 한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산불 나면 불 끄러 가야 하니, 다리 힘을 길러놔야 한다는 것이 당시 총무 영암 스님의 지론이어서 그는 소임 살던 큰 절에 꼭 축구장을 만들었다. 해인사 축구장에서는 이틀 걸러 점심 공양 후에 강원-선원 축구 시합이 열렸다.
“나는 수비수였어요. 숫자 부족할 때 주전으로 뛰고요. 강원의 공격수로 수경 일공 선광 스님이 나섰는데 수경 스님이 군계일학이었습니다. 선원은 팀워크가 좋았어요. 도법 스님이 체구는 작아도 잘 뜁니다. 원톱으로 골잡이였어요. 비등비등한 가운데 선원이 더 많이 이겼던 거로 기억해요. 골을 넣으면 함성이 가야산을 흔들 정도였습니다.”
2년 강원을 졸업(13회)하고 탄허 스님 곁으로 돌아왔다. 책은 조판 작업이 한창이다. 그는 시봉 들면서 출판 작업에 살림 일까지 1인 3역을 하면서 매달렸다. 교열에 조판을 마치니, 탈고 이후 4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 떡 버티고 있는 거지요. 종이 인쇄 제본, 즉 출판비가 없어요.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법당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염송하고 했지요. 거기서 탁 떠오르는 한 소식, 전국 사찰에 편지를 쓰자! 탄허 ‘화엄경’의 난관 봉착을 알리고 ‘예약 판매 할인, 1질당 10만원’ 문구를 넣어 우편물을 발송했습니다. 석달간 약 200질의 주문이 들어왔어요. 탄허 스님 명성 덕분이지요. 그 돈으로 인쇄는 했는데 마지막 제본비가 없어요. 탄허 스님 모시고 동국대를 찾아가 당시 이선근 총장에게 사정하여 빌려 쓰고 나중에 갚았습니다.”
‘신화엄경합론’은 1956년 시작하여 집필 10년, 제작 9년의 과정을 거쳐 1975년 ‘화엄학연구소’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화엄학 집대성 불후의 저작’, ‘불경 한글화에 큰 공헌’ 등의 평을 받았다. 이후 조계종 강원 필수 교재로 쓰이고 있다. 탄허 스님이 열반에 든 1983년 정부는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창화는 13년 입은 승복을 벗고 1978년 환속했다. 이듬해 혼인했고, 그 이듬해 출판사 ‘민족사’를 차렸다. 열셋에 산문에 들어가 총각 스물여섯, 속퇴가 사랑과 무관한 것이냐고 물었더니, 머뭇머뭇 묵묵부답, 그냥 웃고 만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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