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덕칼럼] 석유화학, 어쩌면 새드엔딩
시작에 불과, 갈 길 멀다
4년 전 위기신호 왔는데
미적대다가 여기까지 왔다

자동차, 전자제품은 물론 건축, 생활용품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소재를 공급하는 석유화학산업. 흔히들 산업의 쌀이라 부른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원유를 들여와 납사 뽑아내고, 그 납사에서 플라스틱과 섬유 제품을 만들어 국내 산업을 일으키고 수출까지 한 대한민국이었다. 설비를 가동하는 능력으로는 세계 최고, 그렇게 공장을 돌려 먹고살았다.
모든 산업이 그렇듯이 호황과 불황의 사이클이 있는 법. 석유화학이 특히 심하다. 타이밍만 맞으면 큰돈을 벌 수 있어 투자에 유혹을 느끼지만 공급 과잉에 직면하면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 동네에서 유명한 8-2 법칙이란 게 있다. 10년을 주기로 8년을 굶어도 2년을 벌면 그동안 손실 다 만회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투자 시기나 규모는 저울질해도 설비 감축은 생각조차 않는 게 관행이었다. 늘 버티면 훗날 보상을 받았다. SK, LG, 롯데, 한화, DL 소위 5대 그룹이 배당으로만 뽑아낸 게 2000년 이후 10조원이 넘는다.
석유화학이란 게 답이 뻔하다. 두 개의 기준점이 있다. 공장 가동률 85%. 그 밑은 적자다. 또 하나는 원료가 되는 납사와 거기서 나오는 에틸렌의 가격 차(스프레드)다. t당 250~300달러가 손익분기점. 이렇게 볼 때 우리 석화산업은 분명 위기다. 2022년부터 가동률은 74~81%, 스프레드는 200~220달러로 4년 연속 기준점 밑이다. 10년 전부터 예상한 위기지만 애써 눈감은 측면이 강하다. 중국이 2015년 제조강국 드라이브를 거는 바람에 중간재인 석화 제품이 필요했고 반사이익을 우리가 챙겼다. 그 반사이익이 사라질 때쯤 코로나19가 터져 세계적으로 포장 수요가 급증했다. 그걸 호기로 보고 설비를 늘린 기업도 있다.
중국이 자체적으로 석유화학을 키우고, 팬데믹도 사라지자 화장기 없는 석화산업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중국은 이미 주요 제품 자급률이 100%를 넘겼다. 올해부터는 110%가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출에 나선다는 뜻. 동남아 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할 것이고 한국에도 저가 제품이 들어올 게 분명하다. 또 하나는 중동 국가의 진입. 남아도는 원유로 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이른바 COTC(Crude Oil to Chemical)다. 중동에서 배로 원유를 실어와야 하는 우리와는 원가 경쟁력이 비교가 안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등에 총 8개의 석화 설비가 지어진다. 에틸렌 기준 1100만t. 현재 우리나라 생산능력(1295만t)과 맞먹는 규모다. 신규 투자 동력은 약하나 셰일가스에서 바로 유화 제품을 뽑아내는 미국도 변수다. 그 규모가 4642만t. 중국 다음이다.
공급 과잉은 위기를 낳고, 그 위기는 기준점을 밑돌기 시작한 2022년부터 장부상에 반영됐다. 우리나라 핵심 석유화학(납사분해시설 운용) 기업은 총 9개사. 단지로는 여수, 울산, 대산 등 세 곳. 급기야 재작년에는 적자 규모가 1조4000억원. 작년엔 무려 3조원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과거의 영화가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것. 정부는 2024년 12월 처음으로 경쟁력 제고 방안이란 이름하에 구조조정 시그널을 줬다. 업계가 외부 용역을 의뢰해 책정한 목표는 270만~370만t 감축. 자율적이라고는 하나 등 떠밀려 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안다. 이 안은 구조조정의 기본에 한참 못 미친다는 점을. 선제적이지(preemptive) 않았으며, 충분하지(enough)도, 과감하지(decisive)도 않았다. 오늘 산업통상부가 발표할 석화산업 사업재편 승인은 어디까지나 시작이고 기껏해야 1차 구조조정 5개 프로그램 중 대산 1호만 시동을 건 것이다. 나머지 4개는 물론이고 그 이상까지 봐야 한다. 불편하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적어도 범용제품의 경우 한국은 더 이상 수출산업이 아니다. 오래전 그걸 깨달은 독일과 일본은 내수 중심으로 생산을 전환했다.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야 한다.
[손현덕 주필]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한국인들 역겹다”…동남아서 ‘반한 감정’ 확산·불매운동 조짐도, 왜? - 매일경제
- 대법 “징역 6년은 부족해”…반도체 기술유출 삼성직원 판결 파기환송 - 매일경제
- [속보] 강선우 체포동의안, 국회 본회의 가결 - 매일경제
- “외부인 늘면 불안”…‘국평 70억’ 초고가 단지 보안문 설치하려다, 결국 - 매일경제
- “5만원에 웃돈 주고라도 살게요”…한정판에 오픈런 펼쳐진 ‘스벅 컵’ 뭐길래 [르포] - 매일
- 전한길 ‘러브콜’에 최시원이 올린 성경 구절…무슨 뜻이길래 - 매일경제
- “돈 벌려면 영끌? 이젠 좀 의심스러운데”…신규 주담대 금액 크게 줄었다 - 매일경제
- 송도 원룸 月90만원…대학가 주거비 '한숨' - 매일경제
- 올파포 6.5억·대치삼성 3.5억 떨어지자 … 속속 거래 - 매일경제
- KBO, ‘대만 도박장 출입’ 롯데 4인방에 30∼50경기 출전 정지 중징계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