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체불’ 아닌 ‘절도’ ‘사기’ 뿌리 뽑아야 [아침햇발]

정남구 기자 2026. 2. 2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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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해 9월 정부서울청사에서 임금체불 근절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제공

정남구 | 경제산업부 선임기자

미등록 이주노동자 가운데 임금을 제대로 못 받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밀린 임금을 달라고 하면 경찰이나 출입국관리국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악덕 고용주들이 있어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겐 퇴직금을 안 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비열한 고용주도 있다. 피해자들은 숨어서 피눈물을 흘린다. 노동의 대가인 임금을 그렇게 떼먹는 건 체불이 아니다. 절도요, 강탈이다.

건설 일용직으로 오래 일을 한 지인들 가운데 임금을 떼인 경험이 없는 이를 찾기 어렵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액수에 놀란다. 대개 1천만원을 훌쩍 넘긴다. 근로감독관에게 신고하고 민사소송으로 돈을 받아내려 해도, ‘바지 사장’이 이미 재산을 다 빼돌린 빈털터리일 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다. 이건 체불이 아니다. 처음부터 떼먹을 생각을 한 것이니 ‘사기’다.

못 받은 임금이 쌓이면? 그야말로 “미친다.” 자식 돌반지 팔고, 적금 깨고, 보험 대출을 받아 급한 대출 이자를 메꾸고 아껴 아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걸로 못 버티면 고리대금업자의 밥이 되기 쉽다. 죽어라 산꼭대기로 밀어올린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지는, 그런 과정을 영원히 반복하는 시시포스의 노동 같은 삶. 우리 국가는, 정부는 그런 이들의 피눈물을 닦아주고는 있는가?

우리나라의 임금체불 상황은 심각하다. 2023∼2025년 3년간 체불임금 피해자는 연평균 27만3천명으로 2021∼2022년의 24만2500명에서 12.6% 늘었다. 같은 기간 체불액(연간 누계액)은 연평균 1조3488억원에서 1조9657억원으로 45.7% 늘었다.

체불액 기준으로 보면, 건설업의 비중이 여전히 20%를 넘는다. 제조업의 비중은 30% 안팎으로 가장 크다. 최근 3년간의 임금체불 급증은 경기 악화나 경쟁력 약화로 자금 융통이 어려워진 기업이 늘어난 까닭일 수 있다. 2025년 전체 임금체불액의 약 3분의 2(67.8%)가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것도 이를 시사한다.

그러나 ‘임금체불’을 쉽게 생각하는 우리나라 고용주들의 잘못된 습성이 더 뿌리 깊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회사가 살아나야 일을 계속할 수 있잖냐’는 으름장에 노동자들은 쉽게 무력해진다. 회사가 잘 굴러갈 때 과실을 나눠 준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국내총생산(GDP)이 우리나라의 갑절을 넘는 일본의 경우, 기업 도산 등으로 인해 노동자가 못 받은 임금을 정부가 대신 지급한 액수가 2024년 110억4500만엔(일본 후생노동성 집계), 최근 환율로 1030억원에 그쳤다. 똑같은 잣대는 아닐지라도, 우리나라의 임금체불액이 그 20배에 가까운 것은 심각성을 보여준다.

다행히 이재명 정부가 임금체불 해결과 근절을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2일 임금체불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임금체불은 임금 절도’라는 인식이 현장에 뿌리내리도록 하겠다는 발표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2023년 전년 대비 32.5%, 2024년 14.6% 늘어났던 임금체불액이 지난해 1.1% 증가에 그쳤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만큼 정부 정책의 성과인지는 불명확하다. 지난해 임금체불 관련 강제수사는 1350건으로 전년도의 1339건보다 약간 늘었고, 압수수색이 109건에서 144건으로 늘어났으니 전보다는 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획기적이라 할 만한 성과지표는 아직 싹이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연말까지 체불 피해를 당한 26만2304명(체불액 2조679억원) 중 5022명(2035억원)은 연말까지 대지급금 제도나 체불청산 지원 사업주 융자 등을 통한 ‘청산’이 이뤄지지 못했다. 물론 청산이 이뤄졌다고 해서, 피해가 모두 원상회복된 것도 아니다.

임금체불, 임금 절도, 사기 피해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근로감독관이 성의 없이 대하거나, 회사 편을 드는 듯한 태도 때문에 신고하러 갔다가 속에서 열불이 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 ‘2차 피해’를 유발한다고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라,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에 나태해져버린 일부 감독관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정부가 진심으로 임금체불을 근절하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겠다면 근로감독관들이 ‘적극 구제로 일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게 인식과 여건을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산업재해뿐 아니라, 임금체불도 낡은 유산이 돼버린 시대를 꼭 열기 바란다. 소년공이 대통령이 된 지금이 바로 그래야 할 때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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