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트 날이 휘면 다시 펴서…아픈 누나 곁 엄마에게 메달 안긴 아이

김수연 기자 2026. 2. 24.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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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나눔꽃 캠페인
성준이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 실내 빙상장에서 연습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어떤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후보 선수로 활동 중인 성준(가명·17)군이 그랬다. 4년째 같은 스케이트화를 신고 훈련하고, 팀 선배에게 물려받은 유니폼을 입고 시합에 나가지만 투정 한번 부린 적 없다. 혼자 참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였다.

지난 9일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 실내 빙상장에서 만난 성준이는 힘든 기색도 없이 다섯 바퀴를 연속으로 돌았다. 6살 때부터 성준이를 가르쳤다는 코치 이진수(47·가명)씨는 “성준이는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본인 학년에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며 “선수부터 코치, 학부모까지 이 빙상장에서 성준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가르치기 힘들다는 ‘운동 센스’도, 탄력도, 민첩성도 갖고 태어난 ‘재능 있는’ 아이. 10년 넘게 성준이를 지켜본 코치의 평가다.

늦게 시작했는데도…초등 6학년 때 ‘5관왕’

성준이는 6살 때 처음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자꾸만 넘어지는 모습이 걱정돼, 발목 힘을 기르게 하려 집 근처 스케이트장에 보낸 게 시작이었다. 엄마는 성준이가 이렇게 오래 스케이트를 탈 줄은 몰랐다. 수영이든 피아노든 금방 싫증을 내던 아이였다. 엄마는 성준이가 직접 스케이트 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본 날에야 재능이 있다는 코치님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엄마는 코너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다른 아이들을 앞지르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스케이팅은 코너 도는 게 중요하잖아요. 잘한다고 해서 가서 봤는데, 너무 멋있더라고요.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계속 시켜야겠구나.”

성준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코치의 권유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또래보다 1~2년 늦은 시작이었다. 그런데도 1년 만에 주 종목 500m에서 전국 1등을 했고, 이후 같은 학년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다. 6학년 때에는 전국 종합 스피드스케이팅 초등 부문 5개 전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해에는 잦은 부상으로 연습을 거의 하지 못했지만, 같은 학년 중 유일하게 국가대표 후보 선수로 선발됐다. 손가락 깁스를 풀고 제대로 연습한 지 2주 만에 출전한 대회였다.

지난 9일 오후 성준이가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 실내 빙상장에서 그동안 받은 상장을 펼쳐보이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생계급여로 생활…‘80만원’ 코치 비용 ‘부담’

안타까운 건, 성준이의 재능을 받쳐줄 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준이와 엄마, 그리고 누나 세 가족은 생계급여와 장애가 있는 누나 앞으로 나오는 복지수당 등 200만원가량으로 생활하고 있다. 누나는 선천성 희귀병인 차지 증후군으로, 지적·청각·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엄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누나를 돌보는 데 쓴다. 수시로 대학병원을 찾아 검사받고, 진료받아야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지적 발달을 보이는 누나를 혼자 둘 수도 없다. 허리디스크 통증까지 겹쳐 일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200만원이라는 돈은 세 식구가 한달을 버티기에 빠듯한 돈이다.
지난 9일 오후 성준이가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 실내 빙상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매달 80만원의 코치 비용은 늘 부담이다. 1년에 한두번씩 스케이트 날과 훈련복 교체에 수백만원이 들어간다. 비용 이야기가 나올 때면 엄마는 늘 숨이 턱 막힌다. 이곳저곳에서 성준이 이야기를 듣고 후원금을 보내주는 이들이 있지만, 엄마는 집 보증금을 담보로 생활비를 대출받아 한달을 살아냈던 적도 있다.

참는 법 먼저 배운 아이

성준이는 그래서인지 참는 법을 먼저 배웠다.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 버스를 타고 훈련장과 경기장을 오갔다. 어느 날 자가용으로 훈련장과 집을 오가는 다른 선수들이 부러워 볼멘소리를 한 것도 초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1년이면 갈아치우는 스케이트화 한 켤레를 4년째 신고, 선배들의 훈련복을 물려받아 입으면서도 투정 한번 부린 적 없다. 날이 휘면 다시 펴서 타고, 날이 무뎌져 속도가 안 나도 못 쓸 때까지 날을 갈아 탔다. 누나를 돌보느라 늘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엄마를 원망한 적도 없다.

또래보다 조금 일찍 철이 들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가 없으면 아픈 누나는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는 “아빠가 없으니 내가 가장”이라고 되뇌었다.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와 데면데면할 때도 누나의 밥을 챙겼고, 겨울이 되면 트기 일쑤인 누나의 피부를 걱정했다. 누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엄마가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다. 엄마는 아직도 성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한다. “엄마가 없으면 내가 누나 기저귀 갈아줘야 되겠다, 그치?”

0.01초로 차이로 순위가 갈리는 스피드스케이팅은 ‘장비 싸움’이라고 한다.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은 400만~800만원짜리 스케이트화를 1년도 채 되지 않아 갈아치우고, 기록 단축을 위해 한벌에 10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훈련복을 맞춰 입는다. 스케이트 날이 좋아야 속도를 낼 수 있고, 격한 경기 탓에 날은 자주 휘어지기에 보조 스케이트 날을 챙겨 다니는 건 필수다. 하지만 성준이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이다. 엘리트 체육 선수는 필수로 받는다는 개인 트레이닝(PT)도 받아본 적 없다. 훈련 전후로 집 주변을 뛰고, 집에서 근력 운동을 하고, 홀로 운동센터에 나가 자전거를 타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성준이는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한번도 스케이팅을 그만하겠다고 말한 적 없다.

성준이가 지난 9일 오후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 실내 빙상장에서 코치와 연습을 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0.01초라도 단축 목표” 국가대표 꿈을 향해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에게 고등학교 2학년은 앞으로의 선수 생활을 결정짓는 시기다. 성준이는 그동안 모아둔 장학금과 후원금으로 올해 처음으로 스케이트화를 맞췄다. 다른 선수들이 신는 모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저가이지만, 성준이가 처음 가져보는 맞춤 스케이트화다. 성준이는 후원금을 받으면 무얼 하고 싶냐는 질문에 조심스레 스케이트 날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그 이상의 모금액이 모이면 새 훈련복, 개인 트레이닝, 재활 훈련 등 애초에 가질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말해본 적도 없던 소망들을 꺼내놓았다.

엄마는 성준이가 다치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준이가 학교에 가든, 훈련하러 간다고 집을 나설 때든, 입버릇처럼 ‘조심히 다녀와’라고 해요.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본인 꿈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재능 있다는 말도, ‘조금만 더 지원받으면 더 잘 탈 텐데’라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성준이는 쉽게 들뜨지 않는다. “500m를 35초대에 타게 된다면 그제야 국가대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변의 평가보다 자신의 기록이 먼저라고 했다. 성준이의 당장 목표는 주니어 국가대표 선발이다. 국제대회 경험도 쌓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한발 한발, 차근차근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500m를 36초대에 타겠다는 올해의 목표는 이미 이뤘다. 성준이는 오늘도 0.01초라도 단축하는 걸 목표로 태릉 빙상장을 돌고 있다.

캠페인에 참여하시려면

성준이네 가족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분은 계좌로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됩니다(우리은행 285-999966-18-004 예금주: 월드비전). 네이버 해피빈에서도 후원에 참여하실 수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원하시는 분은 월드비전 대표번호(02-2078-7000)로 문의해주세요. 모금 참여 후, 월드비전으로 연락 주시면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받으실 수 있습니다. 목표 모금액은 3천만원으로, 훈련비와 스케이트 관련 용품 구입비, 생계비 등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예정입니다. 월드비전은 성준이가 목표했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후원금을 투명하게 전달하고 보고하겠습니다. 목표 금액인 3천만원 이상 모금될 경우 성준이 가정의 뜻에 따라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가정에 지원됩니다.

보도 이후

한겨레와 사단법인 함께하는사랑밭이 함께한 ‘2025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뇌병변 중증장애를 앓고 있는 선호씨의 사연(한겨레 지난해 12월23일치 10면)이 소개된 뒤 488분께서 “선호씨 힘내세요”, “선호씨 파이팅!”, “선호씨 가족을 계속 응원하겠습니다”라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2995만6940원(2월19일 기준)의 정성을 보내주셨습니다. 함께하는사랑밭은 “이번 캠페인을 통해 모금된 후원금을 전액 선호씨 치료비와 재활치료비, 기본적인 생계비로 사용할 예정이며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황인 만큼 의료비 부담을 덜고 치료 과정이 중단되지 않도록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함께 지원할 계획”이라고 전해왔습니다. 후원금은 선호씨의 긴급 생계비와 의료비로 전달됩니다. 선호씨 가족을 위해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신 모든 후원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수연 기자 l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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