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PTSD’ 군인의 여성폭력…우크라 페미니스트가 안전망


지난달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에서는 21살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41살 이웃집 여성이 배를 찔려 숨졌다. 전쟁에 참전했던 이 남성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 사회복지 공무원과 의사가 남성을 면담하고 ‘긴급 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남성은 집에 그대로 머물렀다. 정신병원이 전쟁 후유증을 겪는 제대 군인들로 이미 만원이었던 탓이었고, 범죄를 예방할 기회가 날아갔다. 우크라이나 경찰은 남성을 체포해 수사 중이다.
이 지역 여성인권단체 ‘여성의 관점’의 부센터장 마르타 추말로는 한겨레에 “치료와 돌봄 관련 공공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 자기방어 능력이 비교적 약한 여성과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된다”고 전했다.
24일(현지시각) 발발 4주년을 맞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에서 젠더 폭력은 우크라이나 사회에 또 다른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제대 군인이 여성·아동에게 가하는 가정 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집을 잃고 떠도는 피란민은 성폭력에 노출된다. 나라 지키려 자발적으로 입대한 여군에 대한 차별도 여전하다.
평시였다면 성평등과 소수자 권리를 위한 활동을 주로 했을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비정부기구(NGO)들은 젠더 기반 폭력의 생존자를 돕는 것은 물론, 여성·피란민·노인 등에 대한 주거와 돌봄도 제공하고 있다. 전시 사회의 ‘안전망’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가 이달 초 르비우·키이우에서 만난 활동가들은 전후 우크라이나의 재건에도 사회적 약자들의 관점이 배제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난 4일 오후 페미니스트 엔지오 ‘라 스트라다’ 활동가 4명은 러시아군 폭격으로 난방이 끊긴 키이우의 한 건물에서 스웨터를 누벼 입은 채, 쉴 틈 없이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이 단체는 전화 상담센터를 24시간 운영하며 가정·생계 문제 등을 상담한다. 심리상담가 발레리야 본다르는 “원래는 한해 3만건 정도였던 여성들의 상담 전화가 2022년 2월 전면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5만건으로 늘었다. 이 중 90%는 가정 폭력, 성폭력을 호소한다”고 했다.
여성 대상 폭력은 전쟁이 남긴 깊은 상흔이다. 전쟁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알코올 의존증 같은 정신질환을 얻은 군인들이 지역사회로 돌아오고, 이들이 폭력 성향을 보이면 가정 내 여성 등이 첫 희생자가 된다. 그러나 전쟁 통에 의료기관이 포화돼 정부는 이들을 적절히 돕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가를 위해 건강을 잃은 영웅을 홀대해선 안 된다’는 태도로 가정 폭력을 쉬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추말로 부센터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르비우에는 전쟁 부상자를 위한 두개의 병원이 있는데, 이름이 ‘언브로큰’(부서지지 않는)·‘슈퍼휴먼스’(초인)다. 문제는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가정·지역사회로 돌아온 군인들이 여전히 스스로를 특권받은 ‘슈퍼 휴먼’으로 느낀다는 점이다. 그들은 치료와 안정이 필요한 보통의 ‘휴먼’(인간)인데도 말이다.”
피란민 대상 성폭력도 심각하다. 생활 기반을 잃고 의지할 곳 없이 우크라이나 서부나 국외로 피란한 이들을 주거·음식 등을 미끼로 성착취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라 스트라다 부대표인 카테리나 보로즈디나는 “소셜미디어에서 직업을 주겠다며 접근한 뒤 인신매매로 넘기는 수법도 잦다”고 했다.
르비우 기반의 또 다른 페미니스트 비정부기구 ‘페미니스트 워크숍’ 대표 올하 야시첸코는 “더욱 걱정스러운 건 점령지에 고립무원으로 남은 여성들”이라며 “점령군(러시아군)은 성범죄를 권력 과시의 도구로 쓰고 있다. 이 땅에서 자기들이 뭐든 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폭력에 노출되지 않더라도 우크라이나 여성의 삶은 고달프다. 25살 이상 남성들이 군에 징집되면서, 가사·육아는 물론 가계 경제를 지탱할 책임이 성인 여성에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야시첸코 대표는 “기존에도 여성이 가사·감정노동을 제공하고 집안의 모든 것을 돌보는 게 우크라이나의 전형적인 가족 모델이었다. 지금은 여성이 (남편 입대로) 줄어든 가계 수입만큼 벌이도 벌충하게 됐다”고 했다.
이런 현실은 우크라이나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이중의 숙제를 안겼다. 젠더 평등을 향한 대중운동 외에, 당장 폭력에 취약해진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지킬 방법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단체들은 셸터(임시 거처) 마련부터 출발했다. 여성의 관점과 페미니스트 워크숍은 전쟁 초기 피란민들이 르비우로 몰리자, 각각 9채·3채의 아파트를 빌려 이들을 무상으로 재웠다. 피란민이 새 도시에서 주거를 구할 때까지 안전한 정착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피란민이 새 도시에서 생활할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도 이들 몫이었다. 페미니스트 워크숍은 지난해 여성 노인들을 대상으로 스마트폰 사용법 등 디지털 문해력 강좌를 열었다. 야시첸코 대표는 “전쟁 이후 사회가 더욱 (비대면 위주) 디지털로 전환됐지만 어르신들은 공습경보 애플리케이션이나 인터넷 뱅킹조차 쓸 수 없었다”고 배경을 전했다.
라 스트라다는 지난해 11월부터 남성 대상 핫라인을 추가했다. 가정 폭력을 막으려면 남성이 격한 감정과 갈등을 폭력 없이 해결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보로즈디나 부대표는 “‘지금 배우자에게 화가 나는데 때리지 않고 어떻게 화를 다스릴지’를 묻는 상담 내용이 많다”며 “군 출신 남성들에게서 점점 많은 전화가 걸려 온다. 이들이 (핫라인) 다이얼을 눌러 해결책을 찾는 것 자체가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전쟁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돌봄·심리 지원 등 사회 안전망을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꾸리게 된 셈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전쟁 이후 오히려 좋아졌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종교의 영향력이 크고 보수적인 도시로 꼽히는 르비우에서도 그렇다. 야시첸코 대표는 “돌봄이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서비스라는 사실이 전쟁 이후 도드라졌다.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이런 기능을 하자, 이제는 학교 등 공공기관도 성교육 등의 협업을 요청해 온다”며 “우리에겐 큰 승리이고 성취”라고 밝혔다.
단체들은 이런 활동들이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는다’는 페미니즘의 생각에도 부합한다고 강조한다. 전쟁이라는 가혹한 상황에서도 성별·나이·출신지 등의 차이와 무관하게 인간이 존엄을 지키고 살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야시첸코 대표는 “(사회 안전망은) 수요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이들은 주는 대로 받는 ‘불쌍한 수급자’가 아니라, 자기 필요를 먼저 밝히는 ‘주체’가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능력 닿는 한 그것을 채워주는 ‘배트맨’처럼 활동한다. 이것이 페미니즘적인 돌봄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동시에 이들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활동에도 힘을 쏟는다.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 전액을 지역 군부대에 기부하거나, 활동가가 입대하기도 한다. 외부 침공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사람의 생명·안전을 지키고, 문화·언어 등 ‘정체성’을 보존하는 게 페미니즘의 역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라 스트라다 활동가인 올가 솔라파노바는 “이 전쟁은 젠더 폭력에서의 가해자-생존자의 구도를 닮았다. (일부 남성이) 사회나 일터에서 여성이 존재하는 것이 싫어 공격하듯,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으로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아 공격한다”며 “이를 저지하자는 게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그룹의 공통된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야시첸코 대표 역시 “국외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친러시아 정부가 집권 중인 벨라루스·조지아의 사정을 듣는다. 그곳에선 성소수자 권리를 옹호하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만 해도 ‘불법 선전’으로 간주돼 감옥에 갈 수 있다”며 “아직은 미성숙할지언정 우크라이나가 얻은 (표현의 자유 등) 민주주의 토양에서 페미니즘이 뿌리내리길 원한다”고 밝혔다.
단체들은 전쟁이 끝나면 사회의 재건에도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약자를 배제하지 않고, 이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북돋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다. 솔라파노바 활동가는 “전후 우크라이나에선 수많은 시설과 서비스가 새로 필요할 텐데, (무엇을 우선 공급할지 정하는 데) 소외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4년의 전쟁 동안 에너지 기업, 대중교통 운전처럼 이전까지 ‘금녀’의 영역이던 직장에 상당수 여성이 진출했다”며 “이들이 전쟁 이후에도 직장과 지역사회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 없이는 사회의 성공적인 회복이 불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르비우·키이우/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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