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님이 사회불안 야기” 방직공 차언년의 당당한 최후진술

한겨레 2026. 2. 2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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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11화 노동자들의 법정
1982년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시위 때 유인물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지명수배된 사실을 보도한 신문 기사 스크랩

국가의 최고 권한을 파괴적으로 휘두른 자들이 줄줄이 내란재판의 피고인석에서 자신의 행위를 아랫사람에게 전가하거나 형량을 줄이려 애쓰는 비루함을 본다. 최소한의 양심고백이나 알량한 의리조차 난망하다. 법정은 같아도 태도는 너무 다른 오래전의 풍경이 떠오른다.

신선한 충격이었던 기억의 첫 장면은 ‘겨울 공화국’을 출판한 후 구속된 양성우 시인의 재판이었다. 흰 목화솜 바지저고리를 입고 재판장 앞에 선 그는 시 구절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서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를 들어 “진달래는 북한을 상징하는 꽃인데 하필 그걸 피게 하느냐?”는 식으로 이적시하는 검사의 논고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었다. “그럼 봄이면 온 산에 피는 진달래도 다 불온하냐? 김소월도 이적죄냐?” 그런 반박을 한 거 같은데 어찌나 통쾌한지 심장이 다 쿵쿵댔다. 법정 문턱이 닳도록 민주 인사들의 재판에 쫓아다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설마 내가 그 법정에 서게 될 줄이야.

1978년 노동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시위로 구속된 스무살 때, 어쩌면 학습한 재판 방청 덕에 좀 의연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제법 당돌하게 이런 최후진술을 했다.

“저는 구치소 생활을 하면서 우리 노동자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왔는가를 새삼 확인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적어도 먹고 자는 생활의 기본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가장 근로조건이 우수하다 평이 난 원풍모방 기숙사에 있었는데 공장 식당 부식보다 구치소가 더 낫더군요. 그러니 우리 노동자들은 수감자들에게 제공하는 음식보다 못한 걸 먹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저는 지금 편합니다. 다만 걱정할 가족들과 동료들을 생각하면 마음 아플 뿐입니다.”

실제로 나는 일주일씩 3교대 순환근무였던 공장 일 중에도 철야가 몹시 고통스러웠기에 감옥에서 단잠을 잤다. 그뿐 아니라 편히 책 읽고 주는 밥 먹으면서 살이 포동포동 쪄서 석방될 즈음엔 볼이 터질 듯했고 입던 옷은 맞는 게 없었다. 아무튼 그때 이십대 초반이었던 여섯명은 혹독한 조사를 받으면서도 서로 제가 주동자라 나섰다. 감옥 안에서 동일방직의 동료와 원풍모방의 나는 봉사반장을 맡았으며 동료들은 수감자들이나 교도관들이 칭찬할 정도로 생활했다. 법정의 진술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누구 하나 비굴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유명한 최후진술을 꼽으라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 21살 나이에 사형을 선고받은 민주화 운동가 김병곤의 “영광입니다”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극형을 받으니 영광 아니겠냐 일갈한 그와 더불어 “나의 양심은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다. 압제자가 판치는 이 땅에서 양심의 자유는 곧 고난의 자유다”라고 한 김지하의 최후진술도 유명하다. 1985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들의 언어는 독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존엄한 선언이자, 수갑 찬 피고인이 법복의 재판관을 꾸짖는 역설이었으며 큰 반향을 일으켜 많은 이의 심장을 끓어오르게 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지식인들의 역사 바깥, 노동자들의 법정은 어땠을까?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표지(원풍모방 노동조합원 126명의 증언록, 2019년 출판, 필자는 공동편집인으로 참여)

1970년대 민주노동조합의 전설로 거론되는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1982년 9월 국가기구의 폭력을 동원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체되었다. 대다수가 여성 노동자인 560명의 해고자가 발생했고 노조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당장 월급을 보내지 못하면 부모의 농가 부채가 늘고 남동생의 등록금이 끊기는데도 법정에 선 여성 노동자들은 의연했다.

박순애는 지식 많은 이들이 어째서 노동자의 목숨값을 가벼이 여기는지 한탄했다.

“힘없는 자들이 당하는 거꾸로 된 현실이 어떻게 복지사회이며 정의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잘 판단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돈 많은 사장의 목숨이 귀한 만큼 가난한 노동자들의 목숨도 귀중합니다.”

당시 구속자 중 막내인 19살 방직공 차언년은 사회불안의 진짜 주범이 누구냐 되물었다.

“검사님이 우리한테 사회불안을 만든다, 하는데 바로 검사님 같은 분이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요구한 것입니다. 깡패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끌어내고, 집단 해고시키는데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공장일을 내 일처럼 공원들을 가족처럼’ 표어를 붙여두고 내 일처럼 일한 노동자를 해고하고 감옥으로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사회지도층을 훈계하자 재판장이 제지했다.

노동관계법의 ‘제3자 금지조항 위반’으로 구속된 전 노조지부장 방용석은 기소의 부당함과 허구를 반박했다.

“이 사태는 노동쟁의가 아닙니다. 회사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정상적인 운영을 침해당한 폭력입니다. 이 정부가 원풍노조 하나를 부순다고 해서 이 나라의 노동운동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노동운동의 형태가 새로운 양상으로 더 활발하게 전개될 것입니다. 현재 노동쟁의 조정법은 노동쟁의금지법입니다. 노동관계법은 사용자 보호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노조를 파괴하는 행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거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같은 사안으로 구속된 박순희 또한 여러차례 재판장의 제지를 받았다.

“어찌하여 노동자들이 말만 잘해도 도산(도시산업선교회), 글씨만 잘 써도 도산, 친구가 많아도 도산, 모범적으로 현장에서 일을 잘해도 도산으로 몰아붙인단 말입니까. 노동부는 권력의 꼭두각시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 누구의 꼭두각시도 될 수 없습니다. 원풍의 원한 맺힌 바람은 분명 노동운동 부활의 바람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도산’은 당시 공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한 도시산업선교회로, 당국은 이를 좌경시해 “도산(都産) 오면 도산(倒産)한다”(사업체 노동자들에게 도시산업선교회의 영향이 닿으면 그 기업은 망한다는 표현)며 악선전했다.

양승화는 그 시절 법정의 민낯을 성경 구절로 대신했다.

“야훼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형량을 줄이려고 애쓰거나 비루하지 않았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법정에 선 노동자는 너무 많다. 1985년 ‘구로노동자동맹파업’으로 구속된 선일섬유 노조 지부장의 진술 중 한 대목을 더한다.

“정보과 형사가 어느 대학생을 거론하며 그에게 교육과 사주를 받아 똑똑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대학생과 친구 하는 게 문제가 된다면 내가 대학교 앞에 가서 너희들 절대 노동자랑 친구 하지 말라고 외치고 다니겠다….”

방청석의 여성 노동자들이 흐느꼈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영광이다, 일갈하며 간절히 염원했던 그들의 내일을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다. 지식인의 논리정연한 문장이든, 스무살 노동자의 투박한 분노든, 본질은 같다. ‘돈 많은 사장의 목숨만큼 노동자의 목숨도 귀중’하다는 그 당연한 구호는 진행형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일하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누군가는 억압된 권리를 찾기 위해 고공에 오른다. 비루한 변명으로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작금의 재판 풍경을 보며 그날 외친 민주주의 가치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무게인지? 그날의 법정을 소환해 보는 이유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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