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는 영성으로 인도하는 교회의 오래된 전통이다
숨 막히는 개신교 기도 방식의 새로운 돌파구 될 수 있어
지난 며칠 사이 <뉴스앤조이>에 '관상기도'에 대한 기사 두 개가 올라왔다. 하나는 나수진 기자가 쓴 "'기독교인은 명상하면 안 되나요?' 보수 교회가 금기시한 명상 수행하는 크리스천들"(2월 10일)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최주훈 목사의 "루터는 왜 관상기도와 결별했을까"(2월 18일)라는 기사이다. 전자는 신앙을 잃어 가는 성도들이 관상기도 모임을 접함으로 신앙을 회복했다며 관상기도를 소개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반면 후자는 종교개혁자 루터의 관점을 말하며 관상기도가 아닌 루터의 묵상법을 기도 방법으로 소개한다. 그런데 이러한 팽팽한 긴장이 생기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보인다.
우선, 관상기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관상기도는 두 글에서 동일하게 인정하는 것처럼, 초기 기독교부터 내려오던 오랜 기도 전통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엄연히 '명상'(meditation)과는 다르다. 관상기도로 들어가는 방법 중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방식에 '묵상'(meditatio)이 들어 있고 그다음에 '관상'이 이어진다. 그러나 관상(觀想·contemplatio)이라는 말 자체는 "하나님 앞에 머무름"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마리아와 마르다 에피소드에서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머물러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인 것과 같다(눅 10). 타 종교나 마음 수련 등에서 말하는 대상이 없는 '명상'과는 전혀 다르다.
관상기도에 비움의 과정이 있지만, 비움이 다는 아니다. 관상기도는 비움을 거처 결국 채움으로 이어진다. 세상의 것들을 비워야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방식이다. 세상의 욕심, 정욕, 나의 인간적 의지, 생각, 감정 등(pathe)을 비워야 주님 앞에 머물러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채워진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기도의 아홉 단계를 제시하면서, 다섯 번째 단계부터 관상기도를 설명한다. 처음 네 단계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들어가는 반면, 다섯 번째 단계부터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수동적 단계로 들어간다. 이 다섯 번째 단계가 '관상기도'이다. 마지막 아홉 번째 단계는 '변형 일치의 단계'이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단계로, 하나님의 의지로 살아지는 단계다. 즉 아가페 사랑으로 살아가는 단계다. 그래서 루터가 말한 삶에서 투쟁하는 '시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관상기도는 단지 편안함과 쉼으로 끝나지 않는다.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간 제자들이 그 영광을 보며 감탄할 때, 예수께서 산을 내려가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눅 9). 관상기도의 쉼과 평안을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삶의 치열한 현장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갈 것을 지시한다. 이것이 관상기도 과정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반추'(ruminatio)의 내용이다.
관상기도는 하나의 기도 방법이라기보다 오히려 '기도의 상태'에 가깝다. 관상기도로 들어가는 기도의 방법은 다양하다. 거룩한 독서와 시편 기도(Opus Dei), 화살기도, 예배나 성찬 등 다양한 기도 방법이 관상기도로 이어진다. 심지어 현대에는 방언 기도를 통해서도 관상기도에 이를 수 있다고 소개한다(로버트 페리시, <관상과 식별> 중). 그리고 그것에 쉽게 들어가도록 열어 주는 방식이 현대에 와서 '향심 기도'(토마스 키팅 등, 1970년대)로 소개되었다.
관상기도를 딱 잘라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관상기도는 하나님 앞에 머무는 상태를 의미하고, 그로 인해 다양한 영적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간 경험이라든지(고후 12), 베드로가 9시경에 환상을 본 체험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으로 비춰진다(행 10). 구약에도 관상기도와 비슷한 체험들이 역시 있다. 선지자들이나 특히 다니엘 등이 본 환상이나 경험들이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단순한 신비 체험으로 보기 어렵다. 때로는 체험들이 없을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 고요히 머무는 경험이 모두 관상기도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루터의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이다.
루터는 16세기 인물이다. 중세 말, 서구의 신학적 관점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감성에서 이성으로 옮겨졌다. 가장 대표적 사건이 그 앞 세기에 있었던 베르나르도와 아벨라르도의 논쟁이다. 루터가 존경했던 베르나르도는 시토회 수도자로 감성과 체험 중심의 '수덕신학'(the monastic theology)을 대표한다. 반면 아벨라르도는 이성과 합리성 중심의 '스콜라신학'(the scholastic theology)의 대표자다. 중세 서방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감성과 체험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스콜라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루터는 데카르트가 이성의 심판대를 앞세운 근대 바로 앞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경향의 시대 인물이다. 즉, 루터의 신학과 영성은 철저히 당대 사조를 따라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면서 감성이나 신비 체험에 대한 부분은 약해졌고, 특히 성경에 없는 가톨릭적인 요소는 모두 다 배격하는 개혁 시기 풍조에 따라 관상기도 전통도 역시 거부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동시대 인물인 로욜라 이냐시오의 이성과 감각 및 합리성을 중심으로 한 영성 강조에서도 보인다.
하지만 현대는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 모더니즘의 이성과 합리성이 낳은 결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환경 파괴이다. 현대 시대는 이성과 합리성에 염증을 느낀다. 그리하여 감성과 신비 체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각되는 시대가 되었다. 토마스 키팅을 비롯한 몇몇 수도자들이 '향심 기도'를 되살리고 보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 많은 신앙인이 감성과 신비 체험을 찾아 요가나 불교 수행 등을 찾을 때,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마음의 기도 방식이 있음을 소개하며 기독교 신앙 영성의 길로 안내한 것이다. 이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루터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글에서도 역시 나타나는 방식이다(<신도의 공동생활> 중). 또한 현대 루터교 수도원들에서도 여전히 관상기도를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결론적으로 나수진 기자가 소개한 관상기도 모임도 역시 현대시대의 사조에 따라 영혼의 갈증을 느낀 신앙인들이 찾는 모임으로 보인다. 이를 비난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신앙 안에서 건전하게 안내하며 오히려 장려하는 노력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역시 최주훈 목사도 공감하는 부분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두 글이 공통적으로 공감했던, 종래의 "주시옵소서!"를 남발하는, 자칫 욕망이 투사될 수 있고, 아집으로 고착될 수 있는 개신교 기도 방식에 숨 쉴 구멍과 돌파구를 제시하는 열린 시각에서 관상기도를 바라볼 수 있길 기대한다.
우상대 / 목사, 수덕생태영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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