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줄 설화가 빚은 핏빛 광기…‘몽유도원’이 보여준 ‘백제의 한(恨)’ [고승희의 리와인드]
최인호 ‘몽유도원도’ 원작…캐릭터 변화 ‘눈길’
탐욕의 화신 개로왕, ‘사랑에 미친’ 광인 재설정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3/ned/20260223120347170wzuh.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피처럼 절실하고 죽음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1500년 전 고매한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불과 열한 줄에 불과한 원전의 한문 기록은 그 어떤 정념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제48권 ‘열전’ 도미 편이다. 기록의 문장들이 나열한 도미와 그의 아내 아랑, 백성의 아내를 탐한 군주의 이야기는 소설가 최인호가 ‘몽유도원’으로 옮기면서 ‘탐미주의’를 입었다. 소설은 다시 무대로 옮겨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쏟아낸 비극의 삼중주를 노래한다. 그야말로, ‘파국’이다.
뮤지컬 ‘명성황후’, ‘ 영웅’을 제작한 에이콤의 ‘몽유도원’(22일 국립극장 폐막, 4월 11일 샤롯데씨어터 개막)이 2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2002년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몽유도원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 뮤지컬이다. 윤호진 연출가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감동시킬 수 있는 소재”라며 “소설을 읽고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뿌리는 도미전에 있으나 이 설화는 소설과 뮤지컬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탄생했다. 뮤지컬은 우선은 소설의 전개 방식을 따른다. 5세기 백제 개로왕(455∼475) 여경(민우혁·김주택 분)이 꿈에서 본 아름다운 여인이자 도미(이충주·김성식 분)의 아내인 아랑(유리아·하윤주 분)을 가지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야기는 두 갈래에 초점을 둔다. 도미와 아랑의 숭고한 사랑과 함께 여경의 피끓는 집착과 광기에 집중된다. 흥미롭게도 원작은 도미와 아랑의 사랑에 치중하나, 뮤지컬은 도리어 여경에게 더 큰 비중을 둔다.
뮤지컬은 ‘심리극’으로 치환해 각자의 욕망과 비극을 그려온 소설의 감정들을 극대화했다. 백제 시대의 도미 설화가 조선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신흥 왕조와 토착 세력의 갈등, 사랑 이야기를 뛰어넘는 열녀의 표상, 권력의 폭력성 등 시대가 필요로 했던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그러나 절제되지 않는 감정에 집중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설이 쌓아온 개연성과 복선의 고리를 끊어내고, 핵심 사건들을 숏폼처럼 잇는 의도적인 연출로 관객들이 감정선을 놓지 않고 따라가도록 했다.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3/ned/20260223120347546afmb.jpg)
인물들의 재해석은 특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소설이 그린 도미는 여경의 콤플렉스와 분노를 자극하는 ‘발작 버튼’에 가깝지만, 뮤지컬에선 욕망에 휘둘리는 대왕과 비교할 때 이성적 품위를 지키는 군자로 그려진다. ‘열녀 신화’에 갇혔던 아랑에게선 설화 속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정절’의 농도를 덜어내고, ‘운명적 사랑’을 따르는 주체성을 입혔다. 게다가 소설 속 향실은 간사한 권력 보좌관이나, 뮤지컬에선 충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왕만 바라보는 강직한 오른팔로 그려진다.
가장 급진적 변화는 여경이다. 설화 속 개로왕은 ‘폭군’이었고, 소설에선 ‘황음’에 빠진 왕이었으나 뮤지컬에선 그저 사랑에 미친 ‘순애보’에 가까웠다. 대신들의 권력다툼과 왕권 위협에 지쳐 꿈에서 만난 여인에게 모든 것을 쏟는 인물이다. 심지어 왕이 하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술, 여자, 사냥’이라고 말할 정도로 단정한 인물이다.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일하나, 색을 밝히는 욕정의 화신으로 그려진 소설과 비교하면 개과천선에 가깝다. 게다가 꿈에까지 등장해 ‘억겁을 이어온 사랑’이라고 말하니, 이쯤되면 ‘운명’이라 믿을 법도 하다.
왕의 변화는 극의 정서를 완전히 뒤바꾼다. 이 뮤지컬엔 한 마디로 광인은 존재하나 악인은 없는 서사 기법을 따른다. 즉 비극은 ‘도덕적 악’이 아닌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정념 비극을 무대화한 것이다. 소설에선 여경이 아랑을 얻기 위해 꾸민 술수, 아랑이 왕의 욕정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몸종과 몸을 바꾼 것 등 저마다의 계략이 판을 치나, 뮤지컬은 이 과정들을 싹 다 드러내 오로지 각자의 감정과 심리에만 집중했다. 도리어 여경에 대한 전사가 드러나다 보니 아랑을 향한 그의 마음은 극초반 지극히 순수해보이기까지 하다. 물론 시간이 흘러 그 감정은 집착과 광기를 입어 걷잡을 수 없는 파멸로 이끌기는 하지만 말이다.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3/ned/20260223120347889tcfh.jpg)
이 비극적 서사를 완성하는 것은 ‘과잉의 미학’이다. ‘몽유도원’은 뒤로 빼는 법이 없다. 시종일관 모든 감정이 휘몰아친다. 대부분의 넘버에서 감정은 상승 곡선을 탄다. 롤러코스터처럼 지체없이 상승하다 폭발하고, 장면이 전환되다 다시 폭발한다. 엔진 이상으로 과열된 자동차처럼 도무지 속도를 내리지 않는다.
특히 여경의 넘버는 긴 지속음과 상승으로 긴장감을 높인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미학이 꽤나 쏠쏠하게 전달된다. 한국 전통 서사의 핵심 감정인 한(恨)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슬픔을 음미하거나 감정을 회복할 시간을 주진 않지만, 정서적 충격은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일종의 비극 오페라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대신 무대에선 동양화의 여백을 강조한다. 수묵화 같은 고요한 공간은 도리어 인간의 광기를 극대화한다. LED 화면을 통해 구현한 소박한 미디어아트가 한국적 판타지의 정수를 보여준다. 구중궁궐을 표현한 거대한 커튼이 겹겹이 쳐진 왕실, 여경과 도미의 바둑 대전을 그리며 앙상블이 흑돌과 백돌이 돼 바둑판 위 내기 상황을 표현하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휘모리장단이 휘몰아치며 여경의 승리까지 내달릴 땐 카타르시스가 폭발한다.
‘몽유도원’은 여러모로 장단점이 분명한 작품이다. ‘명성황후’, ‘영웅’ 등으로 우리 이야기의 가능성을 입증해 온 뮤지컬 제작사가 흔치 않은 백제 시대를 무대로 올리며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뮤지컬 ‘몽유도원’ [에이콤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23/ned/20260223120348220aamt.jpg)
K-컬처 전성기를 맞아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로 한국적 세계관을 온전히 보여준다. 대금과 피리, 해금, 타악, 꽹과리 등 한국적 악기와 오케스트라, 일렉트로닉 기타를 어우러진 융복합 사운드로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포용성을 살렸다. 정가 이수자인 하윤주, 소리꾼 정윤혜가 뮤지컬에 도전해 한국 소리의 멋을 살린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다만 순수한 집착과 광기의 서사는 숨표 없이 ‘강강강’ 전략을 차용, 직관적 감정을 폭탄처럼 투하한다. 이로 인해 인물의 심리나 서사는 얄팍하고 납작해져 아쉽다. 밀도 높은 스토리보다는 철저하게 감정의 전개, 원초적 욕망과 광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지나친 감정 과잉으로 내달리는 극에 쉼표 역할을 하는 것은 암전이다. ‘몽유도원’은 장면 사이 암전이 많은 것이 특징. 현대 연출에선 대부분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암전 없이 장면을 전환하는데,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극을 진행한다. 많게는 넘버 단위로 암전이 나와 흐름이 깨질 때도 있지만, 이 암전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가르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숨 고르기 역할을 한다.
‘몽유도원’의 재연 첫 공연은 막을 내렸으나 여기가 끝이 아니다. 오는 4월엔 샤롯데씨어터에서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난다. 또 제작진은 2028년 미국 브로드웨이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日입국 거부’ 김창열 “가족 사진까지 미리 준비하고 입국 막아…정부 도움 없었다”
- “이게 500년 전통이라고?”…1만명 뒤엉킨 日 ‘알몸 축제’서 男 3명 의식불명
- 한지민, 촬영장 감독 갑질 폭로…“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전한길 “태진아 고발에 당황…정치색 따라 눈치 보는 연예인들 무슨 잘못”
- 성형 전후 내가 ‘나란히’ 셀카를…기괴한 인증사진에 발칵
- 손흥민-메시 맞대결 직관한 이병헌…그라운드서 깜짝 ‘투샷’
- “이건 너무 심했다”…순직 소방관 사주 본 ‘운명전쟁49’, 유족 측은 “방송 안 내리면 법적 대응”
- 음주차량에 아들 귀가시키던 40대 가장 사망…가해자는 3번째 음주운전
- [영상] “대지 140평인데” 양평 2층집, 2억대로 급락[부동산360]
- 박나래 살쪘나 했더니 “스트레스로 머리 다 빠져. 막걸리 학원도 관둬”…근황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