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재팬’ 지나 슈퍼 전성기 왔다…왜 J컬처는 한국에서 뜨거울까 

조유빈 기자 2026. 2. 2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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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애니·전시·음악까지 전방위 확산…한국 문화시장의 ‘주류’로
드래곤볼·코난·도라에몽이 증명한 ‘장기 IP’…산업 확장 효과 주목

(시사저널=조유빈 기자)

'노 재팬(NO JAPAN)' 이후 약 6년, 일본 대중문화의 위상이 달라졌다. 지난해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체인소맨: 레제편》 등 일본 애니메이션이 잇따라 흥행 성과를 냈고, 원작 만화 단행본 소비도 이어졌다. J콘텐츠는 이제 극장가를 넘어 출판·음악·전시 등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며 한국 문화시장에서 입지를 키우고 있다. 과거 "한일 관계는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지만, 문화는 강하게 연결되길 바란다"고 했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바람처럼, 이제 J콘텐츠는 한일 간 정치적 관계와 무관한 별개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 일부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J콘텐츠가 경쟁이 치열한 한국 시장에서 새로운 '주류'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포스터 ⓒCJ ENM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 ⓒ(주)NEW

OTT가 연 시장…원작 만화 판매량까지 급증

최근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 3주년을 맞아 극장 특별관에 다시 걸렸다. 국내 영화관의 침체가 길어지자 극장가가 흥행을 입증한 일본 애니메이션 카드를 다시 한번 꺼내든 것이다. 실제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N차 재개봉'임에도 꾸준히 관객을 불러들이며 저력을 보여줬다. 일본 콘텐츠의 흥행 효과는 다른 작품들로도 이어졌다. 지난해 8월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57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흥행 1위 기록을 새로 썼고, 일종의 '귀칼 신드롬'까지 일으켰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대중적 영화가 조명받는 명절 연휴 기간에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극장에서 개봉한 《주술회전: 회옥·옥절》과 《주술회전: 시부야사변×사멸회유》도 존재감을 보였다.

J콘텐츠의 질주는 영화관에서 멈추지 않았다. 영화 주제가까지 국내 음원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체인소맨》의 오프닝 테마곡인 《아이리스 아웃》은 영화 흥행 당시 국내 최대 음원 플랫폼 멜론 톱100에서 4위까지 올랐다. 4위는 J팝이 이 차트에서 기록한 가장 높은 성적이다. 《아이리스 아웃》은 유튜브 뮤직 한국 인기곡 톱100 차트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인 《골든》 《소다팝》을 제치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이 흥행하면서 원작 만화를 찾는 손길도 늘어났다. 예스24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귀멸의 칼날》 개봉 이후 한 달간 원작 만화 판매량은 313.8% 늘어났고, 같은 해 9월 《체인소맨》이 개봉한 이후 원작 만화 판매량은 421.8% 증가했다.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포스터 ⓒ소니픽처스코리아
극장판 《주술회전: 회옥·옥절》 ⓒ메가박스중앙(주)

이전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과 《너의 이름은.》과 같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 사랑받았지만, 지금의 J콘텐츠에 대한 반응은 유독 뜨겁다. 특히 현시점에서 한국에서 주목받는 J콘텐츠는 '만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결이 사뭇 다르다. 《귀멸의 칼날》은 일본 출판사 슈에이샤의 《주간 소년 점프》에 2016년부터 연재됐던 작품이다. 2019년 TV 시리즈에 이어 2021년 애니메이션 영화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가 나왔고, 이후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개봉되며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주술회전》도 《주간 소년 점프》에 2018년부터 6년 반가량 연재된 만화다. 영화 《체인소맨》은 전 세계 누계 발행 부수 3100만 부를 돌파한 후지모토 다쓰키의 원작 만화를 기반으로 한다.

원작 만화 팬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던 일본 애니메이션 콘텐츠가 대중적으로 활성화된 이유는 뭘까. 업계는 OTT(온라인 동영상 플랫폼)가 일부 마니아층만 의도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일본 애니메이션과 대중 간 접점을 빠르게 늘렸다고 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OTT 플랫폼의 이용률이 급등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개선됐다는 것이다.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2019년 '노 재팬' 불매운동 등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도가 다시 떠오르는 상황에서 OTT를 통해 일본 콘텐츠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며 "한국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일본은 한국 드라마를 소비하는 양국 간 문화 교류가 재개됐다"고 말했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는 코로나19 시국이 끝나지 않았던 2021년 1월 개봉했음에도 22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후 많은 이의 '추억 만화'인 《슬램덩크》가 2023년 영화화돼 개봉되면서 일본 콘텐츠에 대한 긍정적인 호감이 분출됐고, 같은 해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흥행하면서 J콘텐츠가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콘텐츠 대국'인 일본에는 젊은 세대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가 많다. 양국의 관계로 인해 일시적으로 멀리했어도 결국에는 우리나라 콘텐츠의 빈틈을 일본 콘텐츠를 통해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만화나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음악 측면에서도 우리나라의 아이돌 음악 외에 일본 J팝이나 밴드 음악을 찾는 수요가 많다"고 짚었다. 또 "일제강점기와 시간적으로 가까운 세대일수록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크지만 시간이 흐르며 반일 정서가 약화됐다. 일본 우익 정치에 대해서는 반발하더라도 그와 별개로 일본 문화는 즐길 수 있다는 인식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포스터 ⓒ(주)NEW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포스터 ⓒ(주)NEW

'재미'와 수준 높은 제작 능력 담보돼

OTT라는 채널이 열리고 영화관에 콘텐츠가 연이어 걸리더라도, '보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재패니메이션'을 시청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재미'라는 답이 기본으로 돌아왔다. 최근 넷플릭스로 《주술회전》을 시청한 박정주씨(가명)는 "일단 재미있다. 애니메이션을 찾아 보는 데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라며 "일단 스토리가 흥미롭고 전개가 빨라 몰입도가 좋다"고 했다. 그는 "팬데믹 때 OTT를 통해 자주 접했는데,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흥미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어른용 콘텐츠' 느낌이라 즐겨 보고 있다"고 했다. 《귀멸의 칼날》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한 30대 직장인은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는 내용을 보면 흥미가 생기고,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오가며 이야기를 보는 재미가 있다"며 "극장판이 나오면 꼭 보는 편"이라고 했다.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 콘텐츠는 빠른 액션 전개와 치밀한 서사 구조, 독창적인 세계관 설계가 결합되면서 대중의 호기심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작품 전면에 드러난 만화적인 판타지는 현실 감각을 이탈시키면서 관객들에게 심리적 쾌감을 제공한다. 《주술회전》은 주술사와 비주술사의 서사를 기반으로 전개되고, 《체인소맨》은 악마를 사냥하는 '데빌 헌터'라는 설정 속에서 이야기를 확장한다. 《귀멸의 칼날》은 일본 요괴 퇴치라는 권선징악 서사를 지닌다. 한 영화 관계자는 "최근 인기를 끄는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일단 재미있고, 완성도도 뛰어나다"며 "공격적이고 과감한 연출 방식을 적용한 작품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 머물지 않고 '영화'라는 하나의 장르처럼 여겨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월5일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 점프숍 팝업스토어 포토존을 찾은 이용객들 ⓒ시사저널 이종현

서사를 뒷받침하는 것은 높은 작화 수준이다. 특히 최근 애니메이션들은 작화와 연출 측면에서 실사 영화 수준의 몰입도를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튜디오 마파 등 제작사의 비주얼 구현 능력은 팬덤을 형성하는 기반으로도 언급된다. 극장판 중심으로 강화된 음악과 음향 연출까지 결합되면서 시청각 경험 전반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잘 만든 애니메이션'의 대표성을 지니게 된 이유다.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는 "《주술회전》과 《체인소맨》 등 IP를 보유한 마파, 《귀멸의 칼날》 제작사인 유포터블 등 애니메이션 전문 제작회사의 수준은 '넘사벽'이다. 원작 팬덤들이 갖고 있는 퀄리티에 대한 기대감을 늘 채워주는 부분도 크다"면서 "이미 증명된 원작 코믹스 팬층이 탄탄한 시장인 데다, 확장판 등 극장 개봉용 콘텐츠를 다양하게 선보이는 점도 '팬심'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최근 일본 만화가 애니메이션과 극장 영화, 굿즈 산업 등으로 IP를 확장하는 방식은 일본이 그동안 오래된 캐릭터 IP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오던 방식과도 겹친다. 아동 잡지 연재로 등장한 《도라에몽》은 단행본과 TV 시리즈를 넘어 영화까지 발을 넓히며 4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사랑을 받고 있다. 1994년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를 시작한 《명탐정 코난》은 장기 연재 만화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아직도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시리즈는 매년 일본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른다. 오래된 IP는 한국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24년 《명탐정 코난》 만화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와 부산에서 열린 '두근두근 도라에몽전' 등에는 다양한 세대의 발길이 이어졌다. 한국의 경우 《아기공룡 둘리》나 《달려라 하니》 등의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된 사례는 있으나, 장기 IP 비즈니스로까지 이어진 경우는 제한적이다.

《명탐정 코난》 단행본 ⓒ서울미디어코믹스
영화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포스터 ⓒCJ ENM
《드래곤볼》 ⓒ서울미디어코믹스

수십 년간 창창한 코난과 도라에몽…한국은?

일본은 IP 활성화에 적극적이다. 정부 차원에서 도라에몽을 올림픽용 홍보 캐릭터로 기용하기도 했다. 2024년 6월에는 지식재산전략본부를 통해 애니메이션과 게임, 만화 등을 '국가 핵심 산업'으로 지정했고, 2033년까지 '콘텐츠 해외 비즈니스 매출 20조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도 내걸었다. 지난해에는 일본 조폐국이 《드래곤볼》 연재 40주년을 맞이해 손오공이 그려진 기념주화 세트를 발행한 바 있다. 하나의 만화가 성공하면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하며 수십 년 동안 비즈니스를 이어가는 방식은 산업 활성화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일본에서는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과 게임 IP 등이 캐릭터 시장 확대를 주도하고 있다"며 "《원피스》 등 기존의 메가 프랜차이즈를 비롯해 최근 성공 IP로 꼽히는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등이 각종 라이선싱과 머천다이징, 글로벌 협업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매출을 확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국내외 전시회 등 오프라인 체험형 마케팅과 굿즈·피규어 판매에서 압도적인 수익원을 창출하고, 행사를 통해 신규 소비자까지 유입되면서 팬덤도 확대되고 있다"고 짚었다.

출판 만화를 IP의 기반으로 삼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웹툰·웹소설을 핵심 IP의 원천으로 삼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만화시장의 판도를 바꾸며 등장한 웹툰이 급격하게 성장하자 이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 등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애니메이션 부분에서의 동력은 약하다. 한국의 인기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 《신의 탑》 《갓 오브 하이스쿨》 등의 애니메이션은 일본 스튜디오에서 제작됐다. 지난해 《연의 편지》 《퇴마록》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 등 기존 IP를 기반으로 한 국산 애니메이션의 개봉 움직임은 있었지만 흥행 기록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콘진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상업적 성공은 여전히 아동용 콘텐츠에 의존하고 있다"며 "《명탐정 코난》 《하이큐!!》 《귀멸의 칼날》 등 일본 애니메이션이 오래된 팬덤을 기반으로 꾸준히 관객을 불러 모았다는 점을 볼 때, 국내 관객층은 더 이상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아동용 콘텐츠로만 인식하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애니메이션은 드라마와 비교해 캐릭터·굿즈·게임 등 분야의 장기 수익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국도 관련 시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임만식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 정책분과위원장은 2월6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뽀로로》 《타요》 《티니핑》 등 한국 애니메이션은 글로벌 유아동 시장의 '절대 강자'로서의 부가가치는 입증했지만, 지난해 국내 박스오피스는 외산 애니메이션이 점령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현실적 제작 기간과 경영 불안정성 등의 한계가 있는 '선별적 선지원' 제도가 아닌 '완성 후 지원' 방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예산 규모의 혁신적 확대, 전문 펀드 확충, OTT의 국산 애니메이션 투자 의무화 등의 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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