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니 사건 상고 취하하면 이재명 대통령 노벨상 탄다” [안녕 진화위⑲]

고경태 기자 2026. 2. 2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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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진화위⑲
베트남전과 노수석, 김남주 변호사가 3기를 기다리는 이유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생존자들을 대리해 국가배상소송과 진실화해위 사건 신청 등을 해온 김남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베트남전 티에프 변호사가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안녕’은 작별이자 환영의 인사다.

5년간 과거사 조사기구로 활동해온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또는 진화위)가 지난해 11월26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오는 2월26일 제3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한다. 2기를 돌아보고 3기를 바라보며 시작된 ‘안녕 진화위’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얼굴과 목소리를 찾아 나서는 부정기 연재물이다. 과거사 조사와 규명에 진심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3기로 가는 여정의 의지와 기대를 담는다. 굿바이 진화위! 헬로 진화위!!
해외입양, 그리고 베트남전 하미 학살.

진실화해위 조사관들은 2기에서 가장 예측불허였던 사건을 이 두 가지로 꼽는다. 해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이 들어오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두 사건은 모두 한국 정부가 관여됐지만, 피해자들 국적이 외국이었다. 사건의 향배를 가른 것은 피해자가 ‘동포’냐는 거였다. 그 결과 해외입양은 조사개시가 수용됐고, 베트남전 하미 학살은 전체위원회 표결까지 간 끝에 각하됐다.

사건 신청인 응우옌티탄(69) 등 베트남전 하미 학살 피해생존자 5명은 바로 한국 변호사들 조력을 받아 서울행정법원에 각하취소 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에서 패소한 뒤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지만, 또 져도 3기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할 예정이다. 하미 학살이란 베트남전 시기인 1968년 2월24일 한국군 해병대에 의해 꽝남성 디엔즈엉사 하미 마을 주민 135명이 총격으로 살해되고, 이튿날 미처 묻지 못한 주검마저 불도저로 훼손당한 일을 가리킨다. 2001년에는 한국 참전군인 단체(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예산을 지원해 이곳에 세운 위령비 비문이 한국 정부 압력으로 연꽃 그림 뒤에 가려지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미 학살 피해자들의 법률대리인 중 한 명인 김남주 변호사(50, 법무법인 도담 대표)를 지난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2017년 결성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베트남전 진실규명 티에프(TF)의 주축이다. 지난해 8월까지 9년 동안 이 티에프 단장을 맡았는데, 지난 한 해에만 일곱 차례 베트남을 다녀올 정도로 매달려 왔다.

2023년 5월17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앞에서 김남주 변호사(오른쪽)과 심아정 연구자가 “진실화해위는 하미 학살에 대한 조사를 개시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날 진실화해위는 전체위원회를 열어 하미 학살 조사개시 건을 상정했으나 다수 위원의 반대로 각하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베트남 퐁니 사건도 법률대리를 맡고 있다. 1968년 2월12일 74명이 숨진 퐁니 사건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66, 하미 피해자와 동명이인)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선 1·2심을 승소해 역사적인 판결로 기록됐다. 퐁니 사건은 증거가 풍부해 바로 소송에 돌입할 수 있었다. 하미 사건의 증거는 국가기관이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실화해위에 신청했다. 그는 대법원에 가 있는 퐁니와 하미 소송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퐁니 사건은 이재명 대통령이 상고를 취하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이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탈 것이다. 하미는 대법원에서 어떻게 나오든 3기 진실규명 신청을 다시 할 예정이다.”

그는 곧 출범하는 3기 진실화해위가 반갑다. 진실규명의 시간적 범위가 ‘2001년 11월까지’로 9년여 확대돼, 하미 사건 말고도 진실규명 신청할 사건이 더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친구 노수석의 죽음이다. 연세대 법대 95학번 동기였던 노수석은 1996년 3월 함께 참여한 가두시위 도중 사망했다. 군 복무 시기를 제외하고 매년 친구의 기일을 챙겨온 김 변호사는 아직도 그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제 그 몫은 진실화해위에 있다고 여긴다. 같은 해 8월 한총련 연세대 사건 직후 검찰이 3000여명의 한총련 대의원에게 탈퇴서를 요구한 일도 조사가 필요한 ‘양심의 자유 침해’라 여긴다. 그 역시 피해자 중 하나다.

충북 진천 출신으로 2005년 제47차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이 된 김 변호사는 ‘열혈 행동파’이자 ‘치밀한 조직가’ 스타일이다. 2024년 12·3 내란사태 직후에는 윤석열의 한남동 관저 앞에서 1인시위를 최초로 시작했다. 덕분에 ‘1인시위 전문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2017년엔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과 관련해 ‘내놔라 내파일’ 운동을 주도해 정보공개 결정과 국정원장 사과를 받아냈다. 중소기업과 영세상인, 세입자들 소송을 많이 맡았고, 민변 민생경제위원장으로도 일했다. 이런 와중에 베트남전 피해자 조력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그렇게 얻은 신뢰로 2024년 9월에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위촉됐다. 김 변호사는, 그 시작점에 노수석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인터뷰는 노수석과 베트남전에 관한 이야기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해 7월29일 민변 2005년 베트남 평화기행에서 퐁니(가운데)와 하미의 응우옌티탄을 만난 김남주 변호사. 김남주 제공
지난해 여름 민변 베트남전TF가 참가자를 모아 베트남 평화기행을 갔을 때 하미 위령비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김남주 제공

― 3기 진화위에 하미 사건 다시 신청할 건가요.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함께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공감하는 분위기입니다. 베트남 피해자와 유족분들에게 조사개시 신청해야 한다고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근데 그분들께 설명해 드리려면 복잡합니다. 지난번 소송해서 두 번이나 졌는데, 이건 또 뭐냐고 하겠죠.(웃음) 이해하기 복잡합니다. 조사개시 하지 말자고 하실 분은 없겠지만, 직접 가서 설명해 드릴 예정이고요. 쯔엉티투 할머니 등 신청인으로 추가할 분도 있어요. 신청인이 기존 5명에서 10명 정도로 꾸려질 수도 있습니다.”

―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 나오면 어쩔 생각인가요?

“영향이 있겠죠. 법원 판결은 진실규명 범위와 관련 진실화해위 기본법(과거사법) 2조1항4호(1945년 8월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까지 헌정 질서 파괴행위 등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사망·상해·실종사건, 그 밖에 중대한 인권침해사건과 조작의혹사건)에 해당하느냐를 놓고 다퉜어요. 사실 저희는 2조1항6호(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진실화해위가 이 법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으로 적용해달라고 했는데, 법원은 4호에 관해서만 판단하고 6호는 구체적 설명 없이 각하했거든요. 대법원 판결이 나오더라도 4호에 대한 영향만 있다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6호, 즉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진실규명이 되느냐는 대법원이 아니라 진화위가 판단할 문제인 겁니다. 물론 3기 진화위에서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개시가 되기 전에 대법원에서 전향적 판단을 내리거나 판단이 안 내려지기를 기대하지만, 불리한 판단이 나오더라도 6호로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면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생존자들을 대리해 국가배상소송과 진실화해위 사건 신청 등을 해온 김남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베트남전 티에프 변호사가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왜 진화위는 조사개시를 각하했을까요?

“정치적 노선의 차이겠죠. 2기 초대 정근식 위원장 있을 때 해야 했는데, 정권 바뀌면서 위원장이 김광동으로 바뀌었잖아요. 김광동 위원장과 이옥남 상임위원, 차기환 위원 등은 이걸 대체로 조사하고 싶어하지 않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피해자가 우리 혈통이 아니라고 해서 소극적으로 판단한 거죠. 아쉬운 점은, 정근식 위원장이 본인 재임 기간 퐁니 사건 응우옌티탄 면담도 하고 적극적이었는데, 왜 조사개시 결정은 안 하시고 떠나셨을까요?(웃음) 아쉽습니다.”

― 민변 베트남전 티에프에서 하미 사건 조사를 하지 않았나요?

“퐁니 사건 만큼 풍부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피해자 인터뷰를 하고 문헌도 조사했죠. 파월한국군전사와 작전부도도 보고, 이걸 생존자 진술과 맞춰보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퐁니 사건보다 부족한 점이 많아요. 제3의 증거들이 더 필요해요. 제가 관심을 둔 것은 당시 다낭 인근의 바다에 띄워져 있던 독일병원선 기록이었어요. 하미 피해자들이 그 병원선에서 치료를 받았어요. 퐁니와 하미 마을 주민분들이 그렇게 증언을 해주셨죠. 하미의 응우옌본 아주머니 동생은 턱이 날아갔는데 독일 병원선에서 치료받고 살았어요. 나중에 독일을 거쳐 미국에 입양 갔다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죠. 독일 에버트 재단 통해서 독일적십자에 물어봤는데, 자료가 없다더라고요. 정말 없을까요? 전산화가 안돼서 못 찾을 수 있는데, 기록은 남아있지 않을까 합니다. 3기 진화위에서 조사개시 결정이 나면 해외자료 찾으러 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 베트남 피해자들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뭘까요?

“2015년 4월 퐁니의 응우옌티탄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민변 변호사들이 관심을 갖게 됐죠. 그해 7월 말에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온 뒤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이후 티에프에서 함께 한 배광열·박진석·임재성·이선경·김선영 변호사 등을 처음 알게 됐어요. 2018년 4월21~22일 대한민국을 피고로 한 모의법정인 시민평화법정(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열었는데, 그때 퐁니와 하미의 두 탄(응우옌티탄)님이 원고로 참여했어요. 이후 퐁니 탄 님을 위한 국가배상소송과 하미 탄 님 등을 신청인으로 한 진화위 진실규명 신청을 하면서 활동 폭이 넓어졌지요. 그러다 보면 정 이 들잖아요. 두 탄 님뿐 아니라 하미의 꼬이 할아버지나 쯔엉티투 할머니와도 그렇죠. 정 없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살갑게는 못해도 잊어버리거나 매몰차게 발길을 끊고 그러지는 않죠. 꼬이 할아버지와는 한국 정부 압력으로 가려진 하미 위령비 비문에 대해 어떻게 할지 말씀을 나눴어요. 저는 ‘당사자들이 요구해도 될까 말까 하다.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편지라도 써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꼬이 할아버지도 공감했는데 최근에 그만 뇌졸중이 오셨어요.”

― 한국의 변호사들이 베트남전 피해자들 위해 변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쩌면 동아시아에서 일본 변호사한테 배워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1980년대와 1990년대 일본 변호사들이 전남 고흥 소록도에 가서 한센인들 증언 듣고 일제 강점기 강제불임수술 소송 진행을 했어요. 그때 한국 변호사들은 소록도 관심 없었고 몰랐죠. 이거 하면서 한국과 일본 변호사들이 정보교류도 하게 됐고, 소송에 한국 변호사들도 참여했어요. 과거사 피해자들의 법적 구제에 대한 기술과 정신을 일본으로부터 전수받은 셈이죠. 다만 저희는 아쉽게도 현재 베트남 변호사들과 협업은 못 하고 있어요.”

학생 시절 한겨레 카메라에 잡힌 김남주 변호사. 연세대 법학과 2학년이던 1996년 3월30일, 연세대에서 열린 노수석 사망 규탄 집회에서 울먹이고 있다. 노수석이 사망한 다음날이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 친구 노수석의 기일을 매년 챙긴다고 들었어요.

“대학 2학년 때인 1996년 3월29일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주최로 열린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결의대회’를 같이 나갔어요. 학교에서 집회하고 종묘 거리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합시위를 한 거죠. 우리 학교 법대에서 선봉대로 10명을 꾸렸는데, 저랑 수석이가 함께 들어갔어요. 그 집회에 나갔다가 죽었으니까 엄청 충격을 받았죠. 군대 갔을 때 빼고는 한 해도 빠짐없이 기일을 챙겼어요.

같은 과 동기였지만, 같은 동아리도 아니고 같은 운동권 정파도 아니어서 그날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됐어요. 수석이가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나도 무서워 죽겠는데 저런 이야기 왜 하나 했어요. 나중에 사인은 심비대증에 의한 내인사로 나왔어요. 외부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는 거죠. 저는 믿지 못해요. 민사소송에서도 패소했어요.”

― 그날 분위기가 어땠나요?

“현장에서 400여명이 연행됐어요. 보통 그런 집회에서 수십 명 연행해가는데 좀 과하다 싶었어요. 경찰이 엄청 폭력적이었어요. 종묘에서 최루탄을 쏘면서 학생들이 쉬지 못하게 쫓아왔고, 곤봉으로 때리면서 시위대를 양편에서 몰았어요. 수석이가 을지로 국립중앙의료원 앞 조그만 인쇄 골목으로 숨어있다 죽었는데, 그 전에 경찰 곤봉에 맞았고, 다리에 쥐가 나서 후배의 부축을 받기도 했고요. 갑자기 비가 와서 추웠던 데다, 종묘에서 동대문 운동장을 끼고 을지로까지 돌아오느라 피로했죠. 여기에 경찰에 대한 공포까지 겹쳤던 상황이었어요.

수석이는 2000년 설치된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기는 했어요. 하지만 누가 노수석을 죽게 했는지에 대한 진실규명이 필요합니다. 수석이 아버님과 의논해서 3기 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할까 합니다. 또한 수석이가 죽고 얼마 있다 그해 8월에 한총련 연세대 사건이 발생했어요. 저는 그 이후 검찰로부터 한총련 탈퇴서를 요구받았어요. 제가 당시 3000여명 되는 한총련 대의원 중 한 명이었는데, 검찰 수사관이 탈퇴서 안 쓰면 구속하겠다고 했어요. 이것도 양심의 자유 침해 건으로 3기 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할 생각입니다.”

1996년 8월20일 연세대 종합관 건물에 진입한 경찰들에 의해 검거되는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들. 1996년 8월13일부터 20일에 걸쳐 한총련이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주최한 범민족대회를 경찰이 강경 해산하려 하자 이에 맞서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 2만여 명이 연세대학교 학내 건물들을 점거하여 농성 시위를 벌이다 해산됐다. 3기 진실화해위에서 조사대상의 시간적 범위가 2001년까지 확대되면 이러한 1996년 연세대 사건 피해자들도 진실규명을 신청할 가능성이 크다. 한겨레 자료

― 윤석열 관저 앞 시위를 처음 해서 ‘1인시위 전문가’라는 별칭도 있어요.

“열 받아서 했지요.(웃음) 윤석열 탄핵 부결된 다음날(2024년 12월8일) 아침 일요일이었는데요. 수영장이나 갈까 하고 차 끌고 나왔다가 ‘윤석열은 뭐할까? 탄핵 기각돼서 룰루랄라 좋아할까’하는 생각이 들어 한남동 관저 앞으로 차 몰고 갔죠. 그 앞에서 차 창문을 쓱 내려 보니 경호원들이 그냥 가라는 거예요. 차 세우는 데 아니라고. ‘탄핵하고 감방에 처넣어야 할 인간을 아직도 보호하네’ 하는 마음에 화나서 차 세우고 걸어서 내려왔는데, 그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 하나도 없고 동네가 평온했어요. 나라도 시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집에 가서 아들 스케치북에다가 ’내란범 윤석열 즉각 체포·구속하라’라는 활자 붙이고, 오후 5시부터 1인시위를 했어요. 전화를 막 돌렸죠. 그랬더니 몇 명이 와 사진도 찍어주고. 그 다음 날부터 릴레이 1인시위가 조직됐죠. 처음에는 경찰이 관저 입구에서 200m 떨어진 곳에서만 서 있도록 했는데, 싸운 끝에 일주일 지나 볼보 빌딩 근처 관저 입구 경계까지 이동할 수 있었죠.”

국회에서 윤석열 탄핵안이 부결된 다음날인 2024년 12월8일 오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첫 시위를 시작하는 김남주 변호사. 이후 릴레이 1인시위가 조직됐다. 김남주 제공

― 앞으로 베트남 소송 관련해 할 일이 많나요?

“두 응우옌티탄 님이 노벨평화상을 받는 게 제 꿈 중 하나예요. 제가 지난해 말에 두 탄 님이 리영희상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조직했었어요. 두 분은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인권운동가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해오셨으니까요. 사실 저는 베트남 피해자분들 만날 때마다 답답한 게 있어요. 너무 순하셔요. 특히 하미 주민분들은 한국 정부 압력으로 가려진 위령비 비문 보면서도 ‘한국 정부가 떼라면 떼는 거지, 우리가 어떻게 못 해’라고 하셔요. 주다낭 대한민국 총영사관에 계란이라도 투척하면서 항의를 하시든가.(웃음) 가려진 비문이 열리기를 원하시면서, 그런 행동이라도 하면 저희가 호응할 텐데 말입니다. 마음은 굴뚝이면서도 자기 나라 정부에 누가 될까, 한국-베트남 사이 갈등 생길까 너무 걱정이 많으세요.”

― 조직가 스타일인가 봐요.

“아뇨. 그냥 혼자 날뛰는 거죠.(웃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안 돼요. 감정에 충실해서 지르는 거죠. 되겠어? 그렇게 회의하면 못 날뜁니다. 윤석열 관저 앞 1인시위 누가 알아주겠어? 그런다고 변하겠어? 그렇게 계산하면 못 날뛸 거 같아요. 베트남 소송도, 베트남 가서 피해자 만나보고 이야기 들어보니 ‘우리가 왜 이렇게 무관심했지? 왜 이 문제 아직도 해결 안 됐지? 누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고, ‘안될 수 있어도 시도해보자’라고 해서 지른 거죠.”

지난해 12월3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제13회 리영희상 시상식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생존자들(화면 왼쪽부터 퐁니 응우옌티탄,하미 응우옌티탄)이 본상을 수상한 가운데, 시상식장에서 관계자들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생존자 법률대리인 김남주 변호사, 심사위원장을 맡은 정연순 법무법인 경 대표변호사.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 마지막 빠진 이야기 있으시면.

“대통령 전과 후가 무게감이 다르겠지만, 저는 퐁니 사건 1심 판결 직후인 2023년 2월8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하신 발언을 기억합니다. 응우옌티탄 승소 판결을 환영한다면서 ‘일본에 우리가 사과받으려면 이 사건을 정부가 전향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제 정부의 수반이 됐으니 본인의 말에 책임을 져야죠.(웃음) 대통령의 마음도 중요하겠지만, 결과가 중요하잖아요. 정근식 전 진실화해위원장의 마음은 우리가 알았는데, 하미 사건 해결 안 하고 떠나셨잖아요. 이후 김광동 위원장 취임한 뒤 조사개시가 각하 되고 문제 해결은 안 되고 꼬인 겁니다. 마음 있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 자리 있을 때 결단하고 성과 내야죠. 이재명 대통령께서 퐁니 사건 상고심 상고를 취하하면 이 문제 해결됩니다. 그러면 그 마음 알아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인권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법원 판결 기다리자’고 하신 거 알아요. 그렇게 되면 더 좋지만, 솔직히 대법원을 못 믿겠습니다.(웃음) 퐁니 사건 상고 취하하면 이재명 대통령 노벨평화상 탄다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퐁니·하미의 응우옌티탄 님 대신 이재명 대통령이 타도 괜찮다고요.(웃음) 다시 말씀드립니다. 퐁니 사건 상고 취하하면 이재명 대통령 마음 알아준다! 노벨평화상 탄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생존자들을 대리해 국가배상소송과 진실화해위 사건 신청 등을 해온 김남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베트남전 티에프 변호사가 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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