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남의 것 [한겨레 프리즘]

정환봉 기자 2026. 2. 2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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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공판 티브이(TV)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지귀연 부장판사)는 윤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연합뉴스

정환봉 | 법조팀장

복수를 꿈꿀 때가 있다. 치밀한 계획을 짠다. 상상력을 담당하는 전두엽에 혈당을 몰아주고 몇몇 장면은 초고화질로 그려보기도 한다. 결국 상대는 비참하게 무너지고, 나는 복수에 성공한다. 그동안 머릿속에서 써내려간 시나리오를 평가해보면, 나는 복수에 꽤 소질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계획을 현실로 옮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복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런 에너지를 증오하는 상대에게 쏟아붓는 것은 낭비다. 영화 ‘올드보이’에서처럼 15년 동안 누구를 가두고 매 끼니 군만두를 먹인다고 생각해보자. 어지간한 수고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수고뿐 아니다. 군만두 한 접시에 8천원으로 계산하면, 15년 동안 밥값만 1억3천만원이 넘게 든다. 부동산값 폭등으로 가둬놓을 장소를 빌리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돈으로 적금을 드는 편이 더 이롭다.

물론 응보의 마음을 삭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천벌이 탄생했다.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악당에게 죗값에 걸맞은 벌을 내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만든 것이 천벌이다. 복수를 남에게 맡긴 것이다. 나쁜 놈에게는 벼락이 떨어지거나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일이 생겨야 한다. 하지만 절대자는 세상만사를 챙겨야 하므로 바쁘다. 어떤 악당은 용케 벼락을 피했고 앞으로 넘어져도 코가 멀쩡했다. 그래서 법이 발명됐다.

오늘날까지 기록이 남은 역사상 두번째 성문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은 ‘동해보복’ 원칙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피해를 준 만큼 처벌하는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칙이다. 싱겁다. 내 팔을 하나 부러뜨린 사람에 대한 복수라면 모름지기 상대의 팔 두개 정도는 부러뜨려야 성에 찬다. 다만 복수의 외주화에는 장점이 있다. 밤새 방망이를 깎고 상대의 동선을 파악한 뒤 기습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줬다. 공격하다 되레 당할 위험도 없앴다. 복수를 위한 시간과 비용을 줄인 것이다. 그만큼을 나를 위해 쓸 수 있게 됐다.

지난 19일,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법률은 제각기 보호하려는 이익이 있다. 법익이라고 한다. 내란죄의 법익은 국가의 존립과 헌정 질서의 유지다. 바꿔 말하면 윤석열의 내란에 피해를 본 것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이 운영되는 기본원리인 민주주의 그 자체다. 죗값이 합당하냐는 평가는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무기징역은 징벌의 최대치다.

단죄에서 끝난다면, 복수를 외주화한 의미가 없다. 윤석열이 파괴하려 했던 그 지점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져야 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평등과 더 많은 평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앞으로 어떤 권력도 윤석열과 같은 꿈을 꿀 수 없을 것이다. 군 최정예부대를 투입하고, 동원 가능한 최대의 경찰력을 쏟아붓고도 내란이 실패한 것은 독재를 끊어내고 민주화를 이뤄냈던 경험이 우리 사회를 더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지금 긴요한 일은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가령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또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기후위기를 늦추고 ‘코스피 5000’의 환호 뒤에 가려진 지독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안을 찾는 것 말이다. 전쟁과 죽음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 가운데에는 인과응보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법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도 포함된다. 개혁을 위한 입법도 필요한 일이다. 다만 그 목표가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을 응징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길 빈다. 우리의 에너지가 공정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 더 많이 쓰이길 소망한다. 그래야 모두가 신뢰하고 기꺼이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탄생할 수 있다. 그런 사회라면 복수 역시 저절로 작동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수고도 덜어질 것이다.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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