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의 우리술 이야기)곡물을 씹어내서 빚은 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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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책에 의하면, 성종(成宗) 8년 정유(丁酉) 해에, 제주 사람 김비의(金非衣) 등이 오키나와의 섬에 표류하다 구출되어 돌아왔다. 탁한 술이 있는데, 물에 담근 쌀을 여자들이 씹어서 죽처럼 만들어 나무통에 넣어 술을 빚는다고 한다. 누룩이나 엿기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술을 빚어 3~4일이면 익는데, 오래되면 시어진다'.
『오주연문장전산고』(1850년 조선 철종 때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에 입으로 씹어 빚는 술인 구작양주(口嚼釀酒)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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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책에 의하면, 성종(成宗) 8년 정유(丁酉) 해에, 제주 사람 김비의(金非衣) 등이 오키나와의 섬에 표류하다 구출되어 돌아왔다. 탁한 술이 있는데, 물에 담근 쌀을 여자들이 씹어서 죽처럼 만들어 나무통에 넣어 술을 빚는다고 한다. 누룩이나 엿기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술을 빚어 3~4일이면 익는데, 오래되면 시어진다'.
『오주연문장전산고』(1850년 조선 철종 때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형식의 책)에 입으로 씹어 빚는 술인 구작양주(口嚼釀酒)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에는 또 다른 기록도 있다.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에서는 여자가 생 갱미(粳米)를 입으로 씹어 술을 빚는다. 이를 중국인이 전해 들었으나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무릇 우리나라에 아이에게 먹일 젖이 없으면, 여자가 생 멥쌀을 많이 씹은 즙을 화로에 넣고 삶아서, 아이의 입에 넣어 삼켜서 목숨을 이어가는 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유구에서 쌀을 씹어 누룩 없이 술을 빚는 것도 일리가 있다'(출전 『유구국지략』).
미인주(美人酒)로 알려진 술에 대한 이야기다. 미인주는 밥이나 쌀을 입에 넣고 씹은 후 뱉어 모은 뒤 발효시켜 만드는 술이다. 주로 여인이 만들었다고 해서 미인주로 불린다. 이 술에 대한 기록은 『지봉유설』(1614년 이수광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에도 등장한다. 여러나라의 술 이름을 설명하면서다. 진랍(크메르, 현 캄보디아) 미인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입속에 넣고 하룻밤 만에 만든 술이고 유구국의 부인은 쌀을 씹어서 술을 만든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상식풍속편』(1947년 최남선이 조선의 풍속에 대해 쓴 책)에는 세조실록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유구국 사신 보수고(普須古)의 진술이다. 깨끗이 씻은 쌀로 밥을 지어 누룩에 섞어서 술을 빚는데, 단지 하루 만에 술이 되니 15세 처녀가 입을 깨끗이 씻고 밥을 씹어서 술을 빚는데, 그 맛이 기막히게 달다'.
쌀을 씹어 술을 빚을 수 있는 것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 중 하나이지만 매우 과학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침 속의 전분분해효소인 아밀레이스의 작용 때문이다. 아밀레이스는 쌀의 전분을 분해해 발효가 가능한 당으로 바꾸는 효소이다. 옛날 사람들도 이같은 당화 과정을 거쳐야 알코올이 만들어진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쌀 등의 곡물을 씹어서 술을 만드는 방식은 세계 곳곳에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중남미 안데스 지역에서도 옥수수를 씹어서 침 속의 전분분해효소를 이용해 당화시키는 방법으로 양조했는데 이를 치차(Chicha)라고 한다. 또 페루 원주민들은 카사바(고구마처럼 생긴 다년생 덩이뿌리 작물)를 씹어서 발효시켜 술을 만들기도 했다.
대만에도 이런 술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대만에는 쌀을 입에 넣고 많이 씹은 것을 대나무 통에 넣어서 며칠 안되어 익는 술이 있다'.
2017년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도 이 술이 등장한다. 신에게 공양하기 위해 만들어 산 속의 사당에 바치는 술이 입으로 씹어서 발효시키는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다.
여러 고문헌에 유구국인 오키나와의 미인주에 대한 기록이 꽤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 일본에서는 이 술이 일반적이었던 모양이다. 다음은 『조선상식풍속편』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여성의 침으로 술을 빚는 풍속은 유구뿐 아니라 일본 고대에 일반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한반도로부터 누룩으로 술을 빚는 방법이 들어간 뒤에 이 방법을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즘도 곡물을 씹어서 술을 만들 수 있을까.
실제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개봉된 이후 작물을 씹어서 술을 만드는 미인주 양조법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지게 됐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나서 같은 방법으로 술을 만들어 동영상으로 공개한 부부도 있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후기였다. 술을 만들 정도의 많은 양의 밥을 씹어 뱉어내고 하는 일은 턱뼈골절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박운석(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 이 글에 인용된 고문헌의 내용은 '한국술 고문헌 DB'에서 발췌하고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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