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이래야 진짜 래퍼지”
아들의 요즘 꿈 중 하나는 래퍼이다.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를 보며 랩 연습 중이다. 아들이 원하니 함께 시청하게 되었지만, 내심 조마조마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가 부와 성공에 대한 노골적 욕망이나 욕설이 섞인 거친 가사에 노출되는 건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화면 속 청년들은 의외로 진지하고 정열적이었다.
그러던 중 외전 격인 ‘야차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 탈락자들을 위한 일종의 패자부활전인데, ‘야차’라는 제목처럼 규칙 없는 무법천지의 매운맛을 예상하며 호기심 속에 첫 화를 열었다. 하지만 정작 흥미로웠던 건 래퍼들의 ‘민낯’이었다. 세상 거칠 것 없던 맹수 같던 래퍼들이 막상 실전 앞에선 온순한 초식동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강한 상대는 피하고 약한 상대만 골라 이른바 ‘배틀’을 신청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비트(반주)’만 고집하고, ‘벌스(랩 소절)’를 아끼기 위해 경쟁 자체를 회피하는 모습이 자주 비쳤다. 결과에 매몰되어 래퍼로서의 기개를 잃어버린 태도였다. 그 와중에 아들과 나는 ‘언텔’이라는 래퍼를 응원하게 되었다. 모두가 몸을 사릴 때 그는 “비트가 있으면 랩을 하는 게 직업”이라며, “래퍼가 벌스를 아끼는 게 말이 되느냐”고 일갈했다. 그는 승패라는 계산기 대신 래퍼라는 정체성을 선택한 유일한 ‘진짜’였다.
생각해 보면 래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은 말이 넘쳐나는 시대다. 누구나 쉽게 목소리를 내고, 자극적인 말일수록 더 빠르게 퍼져나간다. 문제는 말이 강해질수록 감당해야 할 책임 역시 커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말의 무게를 삶의 무게로 지는 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화려한 언변으로 대중을 현혹하지만, 정작 책임질 순간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거나 ‘본의가 아니었다’라며 발뺌하는 비겁한 광경을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결국 언텔은 탈락했지만, 그는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다. “후회요? 누군가한테 무대가 주어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하고 싶은 랩 다 하고 가서 후련합니다.” 아들이 훗날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이크를 잡든 펜대를 잡든, 자신이 뱉은 말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질 줄 아는 ‘진짜’가 되길 바란다. 후련하게 무대를 내려오던 그 래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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