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믿음으로 찍은 도장, 재갈이 되어 돌아오다 [이수진의 이혼 이야기]

한 사업가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손재주가 좋고, 사람을 읽는 눈도 있었습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발품 팔아 제법 규모 있는 사업체 하나를 일궜습니다. 그러다 사업이 커지면서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금계산서, 매출 장부, 세무 신고. 일은 자신 있어도 숫자로 가득 찬 서류 앞에서는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맡겼습니다. 체납이 쌓이고 위험이 커지기 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업자 명의를 아내에게 넘겼고, 회계와 세무를 일임했습니다. "우리 사이에 무슨 서류냐"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고,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계속 현장을 뛰며 사업은 키우는 데 전념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자랐고, 저마다의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떠나자 아내도 떠났습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살림의 절반이 사라진 겁니다. "잘 지내. 나도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매정한 문자 한통만 남긴 채.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온 그에게서 묻어난 감정은 미련도, 억울함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빨리 정리하고 싶다" "나가서 살 수 있을 정도면 된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외도 정황도 있어 싸울 명분도 충분했지만 그는 "다큰 자식들 앞에서 추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며 하루빨리 관계를 끝내게 해 달라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보니 가져올 것이 없었습니다. 사업체의 장부는 아내가 쥐고 있었고, 직원들도 아내 쪽에 붙은 상황. 수십 년간 자신이 일궈온 사업체였지만, 서류 위에서 그는 이미 오래전에 지워진 사람이었습니다. 수십 년 함께 살던 집, 그 집 명의도 아내 앞으로 돼 있었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같지만 막상 이혼 사건을 다루다 보면 드물지 않은 케이스입니다. 많은 분들이 세금 문제로, 혹은 신용 문제로, 때로는 단순히 복잡한 행정이 귀찮아서 배우자에게 명의를 넘기곤 합니다. 가족 사이의 일이니 괜찮을 거라는 믿음으로.
하지만 명의는 단순한 서류가 아닙니다. 사업체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회계를 장악하고, 인사를 결정하고, 자산의 흐름을 통제합니다. 관계가 원만할 때는 보이지 않던 그 구조가,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일군 것을 내 것이라 증명할 서류가 없다는 사실이, 그때서야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 사업가는 결국 공동 재산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작은 합의금으로 만족하고 정리했습니다. 소송으로 다투면 충분히 더 많은 재산을 분할해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한사코 "추해지기 싫다"며 거절해 불리한 조건으로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집과 사업 명의를 자신의 앞에만 뒀더라면 '추한' 소송 없이도 합의로 훨씬 더 유리한 결과를 얻어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번엔 자기 이름으로.
우리는 흔히 믿음과 법적 구조를 반대편에 놓습니다. 서류를 챙기는 것이 마치 상대를 의심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일을 하며 배운 것은 각자의 이름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의존하지 않고 선택하는 관계, 종속되지 않기에 흔들리지 않는 신뢰.
당신은 지금 가장 믿는 사람에게 무엇을 맡기고 있습니까. 그것이 믿음의 증거인지, 아니면 훗날 당신의 입을 막을 재갈이 될지, 관계가 아직 따뜻할 때 한 번쯤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