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처럼 펼쳐지는 사랑과 욕망…
최인호 소설 ‘몽유도원도’ 원작
삼국사기 ‘도미전’ 설화 무대화
죽음도 뛰어 넘는 부부의 믿음
헛된 꿈 인한 파국과 파멸 그려
전통음악·서양 오케스트라 결합
창작 뮤지컬에 ‘정가’ 결합시켜
수묵화 같은 무대미술도 환상적
2028년 세계시장 겨냥 수준작
서사·인물의 밀도 더 채워지면
K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 기대
“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절개가 있었다(都彌者 百濟人也/妻美而有節).”

극을 추동하는 건 백제 왕 여경이다. 용상에 앉아 꾼 꿈에서 “억겁을 통해 사랑해 온 여인”을 만난 여경은 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한 후 전국을 수소문해 그림과 똑같은 여인을 찾는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마저 지운 채 살아왔지만 꿈속에서 아랑을 본 후 자신과 왕국까지 불태우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인물이다. 뮤지컬계 에이스 민우혁과 바리톤 성악가 출신 김주택이 더블 캐스팅됐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노래를 보여줬다.

한국적 미학을 추구하는 작품답게 발광다이오드(LED) 화면 위에서 살아 움직인 수묵 애니메이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모셔널씨어터가 설계한 무대와 조명 그리고 탁영환 작가가 한지와 수묵으로 제작한 영상이 무대 전체를 채웠다. 눈을 잃은 도미가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흘러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산수화다.
극 전개에서 나룻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미를 떠나보내고 다시 아랑이 도미를 찾아가고, 마지막엔 두 사람이 몽유도원으로 향해 나가는 장면까지 서사의 핵심 동선을 만들어낸다.
또 다른 인상적 장면은 바둑 대결이다. 흑백의 세를 다투는 바둑판이 희고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의 합을 겨루는 듯한 군무로 표현된다. 영화 ‘황산벌’(2003)에서 선보였던 인간 장기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이처럼 빼곡하게 채운 무대였지만 주인공의 입체성 부족은 아쉬운 점이다. 여경, 도미·아랑 모두 ‘무력한 연인’과 ‘욕망에 눈먼 권력자’라는 처음부터 정해진 전통적 서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1부 마지막은 바둑 대결에서 진 도미와 여경 앞으로 아랑이 끌려오고 도미가 눈을 잃은 채 쫓겨나는 결정적 장면이다. 그런데 무대 위 감정의 소용돌이가 객석에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극 중에선 채홍사 역할을 하다가 아랑을 풀어주고 여경에게 죽임을 당하는 신하 향실이 입체적 인물이나 자연스럽진 않다. 소설에선 간신인데 무대에선 너무 서둘러 충신으로 바꾼 듯하다. 해수와 진림으로 대표되는 귀족 간 권력 다툼이라는 설정도 여경의 불안과 고립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됐으나 극 전체의 긴장을 끌어올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무대 미술과 음악이 세계 시장을 겨냥한 수준작이니 그 그릇에 담긴 서사와 인물 밀도만 더 채워진다면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4월11일부터 5월10일까지.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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