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전쟁 4년, 환상은 깨졌어도 정의는 필요하다
개전 초기만 해도 러시아의 승리로 금세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러·우크라이나 전쟁이 24일 만 4년이 된다. 기세 좋게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던 러시아가 이 긴 세월 동안 올린 성과는 미미하다. 러시아군은 2024년 1월 이후 우크라이나 영토의 1.5%를 추가로 점령했을 뿐인데 이는 하루에 고작 15~70m 정도를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러시아군이 차지한 우크라이나 도시는 없었다.
전황은 지지부진했지만 전사자는 어김없이 발생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지난 10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4년간 러시아군 약 120만명, 우크라이나군 약 60만명이 숨지거나 다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는 개전 이후 전사자 수에 대해 러시아군은 32만5000명, 우크라이나군은 10만~14만명일 것으로 추산했다. 두 나라는 사람이 죽어 나간 자리에 또 다른 병력을 투입하며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니 비싼 무기를 쓰는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드론을 활용하는 전술만 발달했다. 머리 위에 항상 드론이 떠 있으므로 러시아의 대규모 기갑부대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 러시아군은 도보나 오토바이로 이동하는 소규모 보병 그룹을 활용해 우크라이나 방어선 침투를 시도하고, 우크라이나 드론 부대원들은 눈 위에 남겨진 발자국이나 타이어 자국을 추적해 러시아군을 쫓고 있다. 우크라이나 드론 부대원은 러시아군을 명중시킬 때마다 포인트를 획득하고 이 포인트로 정부가 만든 ‘온라인 쇼핑몰’에서 다시 무기를 산다. 게임하듯 살육하는 일상이 젊은 군인들의 영혼에 남길 상처의 깊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군에 징집되지 않은 사람들도 저마다의 전투를 치르고 있다. 러시아는 침공 이후 겨울마다 우크라이나의 발전 시설을 공격해왔는데 올해는 설상가상 키이우의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이 찾아왔다. 러시아의 공격 탓에 키이우에 있는 약 1400개 아파트 단지의 난방과 전기가 끊겨 도시 인구의 절반 정도인 150만명이 난방 없이 지냈다. 주민들은 집에서도 야외 캠핑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방 안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잔다. 며칠씩 끊겼던 전기가 잠깐 복구되면 그제야 난로와 오븐을 켜 물을 끓이고 빵을 만든다. 젊은이는 전장으로 떠나고 고령자들만 남아 있는 집은 사정이 더 좋지 않다. 76세 나탈리아 카자크는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이웃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는 자신의 춥고 어두운 집을 찾아온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내 노년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제발 우리를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승자 없는 전쟁이 만 5년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외교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지난 17~1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도 소득 없이 종료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 할양 요구는 우크라이나가 수용할 수 없고, 서방이 집단 방위와 유사한 수준의 안전 보장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것은 러시아가 인정할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 전쟁을 시작한 쪽이 러시아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우크라이나에 ‘영토를 내놓고 전쟁을 멈추라’고 요구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우크라이나의 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휴전 협상이 더뎌질수록 전장에 쏟아부을 인구가 러시아보다 적은 우크라이나가 불리해진다. 오는 11월 미 중간선거도 우크라이나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 이 전쟁은 트럼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공산이 크다.
전쟁이 길어질 때 전쟁은 일상의 단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일상이 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환상을 버린 지 오래다. 전쟁이 조만간 끝나리라는 기대도 품고 있지 않다. 우크라이나의 저명한 언론인 나탈리야 구메뉴크가 전선에서 인터뷰한 어느 23세 군인은 지난해 2월 국제법 석사 과정을 그만두고 입대했다고 말했다. 국제법의 원칙과 이상을 더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미국은 전선을 중심으로 비무장지대를 조성하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침략자에게 전리품을 안겨주는 종전 방식이 용납돼선 안 된다. 국제법이 아무리 무력할지라도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시 일어설 희망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정의는 작동하길 바란다.

최희진 국제부장 dai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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