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보다 먼저 봄을 맞는 설강화 [황금비의 수목원 가드닝 다이어리]


황금비 |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해마다 2월이 되면 수목원을 가꾸는 가드너들의 시선은 더욱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입춘이 지나고 조금은 따뜻해진 햇살 아래 꽃망울을 틔우는 이른 봄꽃 소식을 빠르게 알리기 위해서다. 이즈음에는 경쟁하듯 직원들이 발견한 봄꽃 사진과 메시지가 사내 메신저에 실시간으로 올라오곤 한다. ‘겨울정원에 있는 복수초 꽃봉오리가 땅 위로 올라왔어요.’ ‘매화나무 꽃 피기 시작했어요.’ ‘풍년화는 노란 꽃보다 붉은 꽃 품종이 먼저 피네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다양한 식물 중에서도 입춘 무렵 탐방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식물이 있다. 바로 15㎝ 남짓한 작은 줄기 끝에서 땅 위에 눈이 내린 듯 흰 꽃을 피워내는 설강화다.

설강화는 수선화과 설강화속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천리포수목원에서는 2월 중순부터 수목원 곳곳의 화단에서 개화한 설강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땅을 향해 고개를 떨구며 피는 흰 꽃은 바깥쪽과 안쪽이 각각 세장의 화피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쪽 화피가 안쪽보다 두배 가까이 커서 마치 두개의 꽃이 겹쳐 있는 듯한 독특한 모양을 이룬다. 안쪽 화피 조각의 끝에는 연두색의 얼룩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꾸로 눕힌 하트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개화한 설강화 사진을 찍을 때면 일부러 완벽한 모양의 연두색 하트를 찾아보기도 한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꽃송이와 곧은 잎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설강화는 영하 30~40도 수준의 추위까지 견딜 수 있는 매우 강한 식물이다. 수선화과 식물이 대개 그렇듯 설강화는 알뿌리에 많은 영양분을 저장해 춥고 건조한 겨울을 버틴다. 또한 설강화의 수액 안에는 특수한 단백질 성분이 있는데, 이 물질이 마치 부동액처럼 작용하며 세포가 얼지 않도록 돕기도 한다. 프랑스어로 설강화는 ‘눈을 뚫는 꽃’이라는 의미의 ‘페르스네주’(perce-neige)라고 불린다. 가늘고 긴 설강화의 잎이 눈을 밀치며 올라오는 강인한 특성에서 비롯됐다.

유럽 대륙과 서아시아 지역에서 자생하는 설강화는 매년 일찍이 꽃을 피우는 특성 덕분에 오랜 기간 정원 식물로 사랑받아 왔다. 천리포수목원에서는 1978년 미국의 한 양묘장에서 설강화 구근을 들여온 뒤 그늘정원, 겨울정원, 남이섬수재원 등 수목원 곳곳의 화단에 심어 선보이고 있다. 환경만 잘 맞춰 심어주면 자주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 가꾸기에도 좋은 식물이다. 장마철의 과습과 고온에도 비교적 잘 견디지만, 뿌리가 썩을 수 있기 때문에 꼭 배수가 잘되는 땅에 심어준다. 잘 자란 경우 포기를 나누어 개체 수를 늘리기도 쉽다.

설강화와 비슷하게 생겨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식물도 있다. 바로 은방울수선이다. 같은 수선화과에 속하면서도 흰 꽃이 땅을 향해 피는 모습이 비슷한 데다 꽃잎 끝에 연두색 무늬가 있다는 점까지 설강화와 닮았다. 하지만 둥근 꽃송이 모양의 은방울수선은 설강화보다 개화 시기가 늦고, 한개의 줄기에 여러개의 꽃이 피어 한개 줄기에 한개의 꽃만 피는 설강화와 구분할 수 있다. 설강화와 은방울수선의 영어 이름이 각각 ‘스노드롭’, ‘스노플레이크’라는 점도 재미있다.
수선화과를 비롯한 많은 식물은 알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해 춥고 건조한 겨울을 버틴다. 그 덕분인지 아직 겨울 추위가 가시기 전인 2월부터 수목원에서는 다양한 생김새의 알뿌리 식물들이 꽃을 피운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아렌델 왕국의 상징으로도 등장하는 크로커스, 다양한 색깔과 독특한 무늬가 인상적인 아이리스, 꽃잎이 마치 나팔처럼 독특하게 퍼지는 로미에우시 수선화 등 다양한 알뿌리 식물이 화단을 장식한다. 모두 크기 15㎝ 안팎으로 매우 작은 식물들이지만, 찬 바람 사이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존재감만큼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돋보인다.

식물이 잎을 떨구고 동물이 겨울잠에 드는 겨울, 수목원은 가장 바쁘고 분주한 계절을 보냈다. 가을 억새를 정리하고, 구근을 심는 작업이 늦게까지 이어졌다. 탐방로를 정비하는 공사도 길었다. 오랜 시간 탐방객의 발자국을 견뎠던 나무 계단들은 모두 튼튼한 돌계단으로 바뀌었고, 비가 오면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패였던 흙길에는 신발이 젖지 않도록 디딤돌이 설치됐다. 정돈된 수목원의 모습을 환영하듯 설강화 꽃들이 활짝 피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계절, 수목원을 가꾸는 손길은 보이지 않는 땅속에 튼튼히 뿌리를 박고 에너지를 비축해 작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알뿌리 식물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수목원의 봄 풍경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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