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 없는 평범한 삶 올까요”…전쟁 터널 속 10대 지나는 아이들

천호성 기자 2026. 2. 2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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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4년 (상)
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스필노 학교의 지하 교실에서 어린이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이날 아침 9시께 공습 사이렌이 울려 아이들은 오전 수업을 지하에서 들었다. 천호성 기자

15살 밀라나는 매일 잠들기 전 우크라이나 수미주의 고향 마을과 전쟁에 나간 아빠를 떠올린다. 밀라나가 11살이 되던 2022년 수미주는 러시아군의 침공 길목이 되며 포화에 휩싸였다.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났고 우크라이나 서부와 바다 건너 미국, 키이우를 전전했다.

수미주가 폭격 받았다는 뉴스는 밀라나를 괴롭힌다. 포화가 언제 군인인 아빠를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불안도 마음을 누른다. 6일(현지시각) 키이우에서 만난 밀라나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슬픔 속에서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공습 경보가 매일 울리고, ‘전쟁’은 주변 어디에나 있어요. 가끔은 온 세상이 나를 향해 쏟아져내리는 것만 같아요.”

4년의 전쟁은 몸과 마음이 아직 다 크지 않은 아동들에게 깊은 골을 남기고 있다. 전쟁터로 간 부모를 그리며 밤을 지새고, 폭격의 참상은 트라우마로 각인된다. 밤마다 울리는 공습 사이렌은 아이들이 치유될 틈조차 허락치 않는다.

한겨레가 이달 초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아이들은 위안 없는 전쟁의 터널 속에서 유년기를 났고, 그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 저마다 바둥거리고 있었다.

포성에 움츠린 어린시절

14살 아르투르는 유리 깨지는 소리가 무서웠다.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리자의 고향 마을이 전쟁 초기 공습을 당한 뒤부터다. 미사일은 아르투르네 아파트에도 날아들어 유리창을 다 부쉈고, 아르투르는 호흡이 가빠지는 경련을 겪었다.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전선에서 더 먼 키이우로 피란했다.

우크라이나 심리상담가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폭발음과 공습 사이렌에 대한 공포는 어린이들이 가장 흔히 호소하는 어려움이다. 어른의 발걸음도 얼어붙게 만드는 폭격의 굉음에, 아동은 호흡 곤란이나 공황 발작, 불안 증세를 겪기 쉽다. 열살 넘은 아이가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야뇨증도 늘었다. 19일 우크라이나 영부인 올레나 젤렌스카의 연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어린이 73%는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낀다.

아동보호단체 ‘어린이의 목소리’의 심리상담가 율랴는 “공습이 주로 밤에 이뤄지면서 아이들은 어둠을 유독 무서워한다. 잠드는 데 대한 두려움도 크다”고 전했다. 24시간 아동 보호 콜센터를 운영하는 ‘라 스트라다’의 상담가 발레리야도 “아이들이 밤에 직접 전화를 걸어 도와달라고 호소할 정도”라고 했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가족을 잃은 아이들에겐 공습이 더욱 고통스럽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강제로 되새기게 되는 탓이다. 아동 심리 회복을 돕는 비정부기구(NGO) ‘우크라이나의 세대’(Gen. Ukrainian)는 이 전쟁 동안 우크라이나 아동(18살 미만) 10만명이 부모를 잃었다고 추산한다.

소통이 끊긴 아이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 마음속에 자라는 건 무력감이다. 우크라이나의 세대 상담가 빅토리야는 “‘왜 우리 가족이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나, 왜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일어났나’라는 의문에 아이들이 답을 찾지 못한다”며 “(우울감 등으로) 아동의 자해가 늘었다는 통계가 나온다”고 했다.

반대로 무력감은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교사와 상담가들은 전쟁 이후 아이들 간 다툼과 따돌림이 전에 없이 늘었다고 걱정한다. 상담가 율랴는 “‘삶에 제어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낀 아이들이 폭력으로 주변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덜 길은 갈수록 줄어든다. 학교들이 수업을 줄이거나 온라인 비대면으로 바꾸면서, 단짝과 만나 고민을 나누기조차 어려워졌다. 자포리자에 사는 15살 이반은 공습을 피할 지하 시설에서 1주일에 나흘 오전 수업만 듣고 귀가한다. 이반은 “매주 하루는 온라인 수업을 하지만 폭격으로 하루 70∼80%는 정전이라 수업이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전투가 치열한 우크라이나 동·남부에선 유치원이 정부 지침에 따라 문을 닫았다. 아이들은 외출마저 어려워졌다. ‘어린이의 목소리’ 대표인 올레나는 “전선은 어린이의 사정을 봐주며 움직이지 않는다. 다니던 학교가 점령되면 친구와 선생님을 다시 볼 수 없게 되고, 할머니댁이 점령되면 할머니와 갈라진다”며 “전쟁이 아이들에게서 맨 처음 뺏어가는 건 인간관계”라고 했다.

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14살 아르투르가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장래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르투르는 축구팀 오볼론FC의 유소년팀에서 중앙 미드필더와 왼쪽 윙을 맡고 있다. 천호성 기자

그래도 내 꿈은…

이에 아동보호단체들은 전문가 네트워크를 꾸려 아이들의 소통을 회복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유치원생에겐 언어치료사가 말을 걸며 대화 능력을 계발한다. 청소년들에겐 그림 그리기, 글쓰기, 영상 촬영 등으로 자기 감정을 표현할 창구를 열어준다. 이들의 십대가 소중한 것을 상실하는 시간만이 아닌,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시기임을 알려주려는 취지다.

올레나 대표는 “아이들의 미래가 이미 굳어져버리지 않았음을 일깨우려 한다”고 했다.

한겨레와 이야기 나눈 아이들 역시 저마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마음 속의 바람까지 잃은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과목이나 장래희망을 물으면 아이들은 세계 여느 아이들처럼 눈망울을 빛내며 답했다.

이반은 역사 과목을 좋아한다. 수업을 마치면 집에서 따로 영어 공부도 한다. 전쟁이 끝나면 나라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바다에 가는 게 꿈이다.

아르투르는 여전히 고향 자포리자가 그립다. 집을 폭격 당한 친구가 걱정돼 메신저로 매일 안부를 묻는다. 그래도 키이우로 이사한 뒤 공습 공포는 많이 떨쳤다. “사이렌 소리엔 다 적응 됐어요. (공습보다는) 요즘 날이 추워 바깥에서 축구 연습을 못 하는게 아쉬워요.” 아르투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르투르의 꿈은 축구선수가 돼 우크라이나의 명문팀 샤흐타르와 우크라이나 대표팀에서 뛰는 것이다.

6일 15살 밀라나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말하고 있다. 천호성 기자

밀라나는 배우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열두번째 밤’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아빠가 보고 싶거나 연애 고민이 들 때면 시도 쓴다. 힘든 마음이 시구와 함께 덜어진다고 했다.

밀라나는 자기가 쓴 시 중 맘에 드는 한편을 보여줬다. 이런 시구가 적혀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건 지뢰밭이 아닌 평온한 바다/러시아에 뺏겼지만 돌려받을 삶/그 삶은 예전 같을 수 없으리/그래도 우리는 다시 시작할 거야.”

키이우/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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