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역사문화공원 한국 근현대사를 품다] 1. 그와 나 사이를 걷다

윤덕신 기자 2026. 2. 2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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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해방 이후 인물군상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

구리시는 역사와 문화 도시로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 망우리 역사공원 비문을 통해 선각자들의 삶을 발굴해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기호일보는 망우리 역사공원에 묻힌 선열들의 비문으로 풀어보는 우리 근현대 역사 이야기를4회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 주> 

 망우역사문화공원은 격동기 근현대사의 거울이다. 해방전후 다양한 시대와 분야에서 이름만 불러도 가슴 설레는 선구자들이 함께 잠들어 있다. 그래서 이곳을 '한국 야외 근현대사 박물관'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20여 년간 망우리를 누빈 김영식·한철수·조운찬·김금호 4인의 연구활동가가 최근 인문학서 「망우리 비명록」을 출간했다.

망우리인문학연구소가 펴낸 「망우리 비명록」.
이들은 독립운동가, 예술가, 각 분야의 선각자는 물론 이름 없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관점에서 비문을 다시 읽어냈다. 돌에 새겨진 몇 줄의 문장 속에서 시대의 상처와 개인의 결단을 읽어냈다.

지금의 망우역사문화공원은 과거 망우리공동묘지였다. 1933년 양주군 구리면 망우산 일대에 조성됐고 4만7천여 기로 만장을 이루자 1973년 폐장됐다. 현재 6천500여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주요 인물은 80명 남짓이다. 1935년 들어온 송촌 지석영이 이른 시기의 안장자라면 1973년 조각가 권진규는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산책로 5.2㎞를 걷다 보면 둥근 자연석에 새긴 연보비를 만난다. 이 비석들은 이곳에 안장된 애국지사와 근현대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간략히 정리해 놓은 안내서이자 작은 역사 교과서다. 앞면에는 어록을 뒷면에는 생애와 활동을 새겼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안장된 인물벽.
처음 연보비가 세워진 것은 1997년.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오세창, 지석영, 문명훤, 장덕수, 조봉암 등 7인의 묘역 인근에 설치됐다. 이후 시인 박인환, 독립운동가 문일평, 서병호, 서동일, 오재영, 서광조, 유상규, 오긍선 등 8인이 더해졌고, 최근에는 유관순 열사의 연보비도 세워졌다. 

이 가운데 13명은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애국지사다. 문명훤과 서병호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됐다.

연보비는 방문객의 발걸음을 묘역으로 이끈다. 무심히 걷던 길에서 한 문장을 읽는 순간 인물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그 작은 만남이 축적되면서 4인의 연구자는 흩어진 기록을 모아 망우리인문학연구소를 꾸렸고 그 결실이 「망우리 비명록」이다.

# 유관순 

이름은 없지만 흔적은 남다. 산책로 왼편을 따라가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이는 유관순 열사다. 연보비에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의 이태원묘지무연분합장비.
연보비가 있다면 무덤도 있을 것 같지만 이곳은 다르다. 묘 앞에는 '이태원묘지무연분합장비'라는 글귀가 보인다. 열사의 이름은 없다. 해답은 비석 뒷면의 '소화 11년(1936) 12월 경성부'라는 기록에 있다.

1920년 9월28일, 수감번호 371번 유관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장례 후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됐으나 1936년 일제가 택지 조성을 추진하면서 2만8천 기의 무연고 묘와 함께 망우리로 이장됐다. 이 합장묘는 열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장소다.

2018년 유관순기념사업회는 '유관순 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워 넋을 기리고 있다.

# 3·1운동 민족대표의 언덕

팔각정 주변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오세창(천도교)·한용운(불교)·박희도(기독교)의 묘가 삼각점을 이루며 자리한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은 독립선언의 상징적 공간처럼 다가온다.

오세창과 한용운은 각각 건국훈장 대통령장과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반면 박희도는 변절의 이력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같은 선언서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후의 삶은 서로 다른 평가를 낳았다.

한용운의 묘는 1979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서울현충원 이장 논의가 있었으나 딸 한영숙의 결단으로 망우리에 남았다. 강석주 스님 등이 550자로 비문을 짓고 서예가 김응현이 글씨를 써 1980년 3월 1일 제막식이 열리면서 만해의 묘는 세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역.
위창 오세창은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다. 이 공원에 방정환, 문일평, 안창호,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 등 묘비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를 만나볼 수  있다. 그의 비문은 전홍진이 짓고 손재형이 앞면의 전서를 쓰고, 김응현이 뒷면의 비문을 썼다. 오세창이 지인에 글로 베푼 것을 따른 것이다.

박희도는 변절이라는 댓가로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하나라는 새긴 비문에서 그가 최연소 민족대표였음을 알려준다. 무덤마저 쓸쓸하다.

이종일·나용환·홍병기·박동완 등 4인은 한때 이곳에 안장됐다가 1966년 현충원으로 이장됐다. 무덤은 옮겨졌지만 이 언덕은 여전히 3·1운동의 숨결을 간직한다.

# 9인 9색, 독립운동의 흔적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20명 남짓 독립운동가의 묘가 남아 있고 그중 9기의 묘역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구리시 교문동 일대에는 한용운·오세창·문일평·방정환·오기만·유상규의 묘가, 중랑구 망우동 일대에는 오재영·서광조·서동일의 묘가 있다.

문일평의 묘역에는 두 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무덤 앞에 세워진 '문호암묘기'는 벗이자 동지였던 정인보가 글을 짓고 김승렬이 글씨를 썼다. 벗의 시선으로 기록한 문장은 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그의 생애를 담담히 정리한다.

무덤 옆 비문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제자 격인 후학 이규태가 글을 짓고 직접 글씨까지 남겼다. 스승의 학문과 인품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자가 새긴 문장은 존경과 추모의 마음이 배어 있다.

독립기념관에 설치 된 원수부 13도창의군 서울탈환 전투모형.
오기만의 묘는 가족묘다. 이 묘는 가족 납골묘 형태로 일제 말에 서서히 일본식 묘제가 망우리에도 하나둘 자리 잡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둘레석 한가운데 부친의 이름을 새기고, 좌측에는 모친과 형제의 이름을 미리 새긴 가문의 대대지묘로 삼았다.

그러나 역사는 비문에 새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남북 분단으로 오기영과 부모는 끝내 이곳에 안장되지 못했다. 결국 이 묘역에는 형 오기만과 오기영의 첫째 부인 김명복이 영면하고 있다. 함께 묻히고자 했던 가족의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둘레석에 남은 비명록만이 흩어진 가족사를 증언한다.

춘파 서동일은 자신의 묘비가 없는 유일한 애국지사다. 비문에는 오직 부인 최옥경의 이름만 새겨져 있다. 원래 이 묘는 부인의 묘였으나 1995년 춘파가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합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1973년 만장으로 인해 더 이상 새로운 묘나 합장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1990년에 서동일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면서 특별 예외적으로 합장이 허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비석 뒷면에는 자식들의 이름이 페인트로 덧그려져 있어, 관리와 기록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며 안타까움을 남긴다.

오재영의 경우, 연보비와 묘비에 적힌 이름이 다르다. 연보비에는 '오재영'으로 알려졌지만 비문에는 그의 본명인 '오준영'이 새겨져 있다. 이는 공적 이름과 사적 이름이 교차함을 보여준다.

또한 망우리에는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묘비도 존재한다. 김기만(임시정부), 김분옥(3.1운동), 나우(임시정부), 이병홍(3.1운동), 이영학(흥사단), 조봉암(중국), 허연(흥사단) 등이다.

조봉암 묘에는 아무 기록도 없는 백비가 서 있다. 이는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법살인 제1호로 희생된 그의 죽음을 증언하는 역사적 흔적이다.

이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망우리 비명록」에 기록되어 국가로부터 공식 서훈을 받지 못했더라도 역사 속에서 그들의 흔적과 희생이 잊히지 않도록 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전경.
# 정미년, 13도 창의군의 기억

1907년 정미년, 정미7조약 체결과 군대 강제 해산으로 고종이 퇴위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이인영과 허위는 총대장·군사장으로 '원수부 13도창의군'을 창설, 해산 군인과 의병을 결집해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했다.

양주 수택리(현 구리시) 한강변에서 1만 명 집결을 도모했으나 일본군의 차단과 교전으로 실패했다. 이후 허위와 김규식이 300명 돌격대를 이끌고 단독 공격에 나섰지만 신식 무기에 밀려 좌절됐다.

흩어진 창의군은 만주·미주 등지로 퍼져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고 이는 항일투쟁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서울 직접 공격으로 기록된다. 망우리 언덕 아래에는 이를 기리는 탑이 서 있다.

#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침묵의 공간이 아니다

돌(비문)에 새겨진 글은 말을 건다. 이름을 남긴 인물과 이름조차 흐릿해진 무연고 묘까지 이곳의 비문은 한 시대의 선택과 책임을 증언한다. 「망우리 비명록」은 그 문장들을 다시 읽어 오늘의 언어로 풀어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묻는다. 왜 그들은 그 길을 택했는가? 무엇이 그들을 감옥으로, 망명지로, 그리고 이 언덕으로 이끌었는가. 비문은 과거를 기리는 동시에 현재를 비춘다.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희망이 공존하는 곳. 망우역사문화공원은 그렇게 오늘도 우리 곁에서 '그와 나 사이 걷는 길'로 남아 있다.

구리=윤덕신 기자 dsyun@kihoilbo.co.kr

<이 기사는 「망우리 비명록」 공동저자인 한철수 향토사학자의 도움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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