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매일통신] 고산자와 이순신이 전하는 압도적 유산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2026. 2. 2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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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구름 관객
대동여지도 실물 전시 압도적 위용
우리들의 이순신 전시에 30만 몰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지난 설 연휴 기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을 찾았다. 대동여지도 실물 전시를 보기 위해서다. 국중박은 지난해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했다. 1층의 상설전시실부터 압도적인 대한의 유산과 마주한다. '역사의 길' 초입에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2첩 전체를 펼쳐 놓았다. 1861년(철종 12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여러 형태로 소개됐지만 실물 크기의 지도를 눈 앞에서 만나는 기회는 드물다.

 대동여지도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22개 층으로 나눈뒤 각 층의 지도를 1권의 첩으로 만든 접이식(분첩절첩식) 지도다. 22권의 첩을 모두 열어 펼치면 세로가 약 6.7m, 가로가 약 3.8m에 이르는 대형지도가 된다. 이번 전시는 아쉽게도 천장 부분의 환풍시설 때문에 원본을 100% 구현하지 못하고 99%의 실사출력을 했다. 7m에 달하는 한반도 지도 앞에 서는 순간 웅장한 규모와 세밀한 표현에 압도 당한다. 문화유산 앞에서 정신이 혼미해 지는 일은 까무라칠 정도의 오르가즘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실물크기로 전시된 대동여지도.

 필자는 지도 덕후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시절, 중동에 돈 벌러간 외삼촌이 귀국한 뒤 선물로 사준 금성사 세계대백과사전의 세계지도와 지구본을 책상 앞에 두고 지리를 익혔다. 지리에 대한 욕망은 인문학의 보편적 관심사이지만 우리나라는 특별한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드러나 있듯 한반도에 자리를 잡은 우리민족은 사물을 그림으로 옮기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그 바탕이 무리집단의 이동경로를 그림으로 이용했고 지도의 출발이다. 그런 노력이 인문학으로 축적돼 1402년(태종 2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가 만들어졌다. 다소 과장된 상상력이 반영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후 업그레이드를 시작했다. 영조 때 정상기가 백리척(百里尺)부터 신경준의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까지가 그 증좌다. 지도 덕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고산자의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졌다.

 김정호는 지도 덕후 가운데 단연 독보적이다. 그를 두고 대한의 산하를 밟지 않고 서책을 편집한 지도편집자라고 폄하 하는 이도 있지만 단견이다. 물론 최남선이 꾸며낸 "한반도를 3번 돌고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며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과장이다. 지도 덕후인 김정호는 조선 각 지역의 관아에서 제작한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토대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가장지도란 각 지역 유력 집안에서 사사로이 만든 지도다. 양반가의 임야나 농경지를 상세하게 표시해 정확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에서 "고산자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해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했다"고 밝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조선후기의 교통통신 상황이나 고산자의 가정형편 등을 고려할 때 대한의 산하를 3번씩 돌고 백두를 여덟 번 올랐다는 이야기는 최남선의 '영웅담'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발견한 역사적 실체와 소문의 괴리는 국중박의 또다른 기획전시인 '우리들의 이순신'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지난해 광복 80년의 기념전시로 이순신을 펼쳐 보인다는 소식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다음달 3일이면 전시를 접는다는 소식에 마음이 급했다. 소문은 인파를 불러 설 연휴 막바지 국중박은 이순신 덕후들이 장사진을 펼쳤다. 누적 관람객이 30만명인데 연휴에만 11만명이 몰렸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것은 부분적으로 소개된 이순신의 다양한 흔적이 종합적으로 정리된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전시실은 모두 4개 테마로 정리했는데 이순신 종가 소장품을 비롯해 국보·보물·등록문화유산 등 총 258건 669점이 처음 한자리에 공개됐다. 이미 관람한 울산 시민들도 많겠지만 난중일기 친필본이나 이순신 서간첩,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 소장 '정왜기공도병' 등 시대를 증언하는 핵심 유물은 다시 만나기 어려울지 모르니 놓지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필자에게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물은 어리석고 못난 군주 선조 이연에 대한 기록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마지막까지 경계하고 질투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마지막 대목에서는 반전이 있었다. 선조는 노량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소식을 듣고 통한의 교서를 내렸다.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파직한 것에 대한 반성의 글로 교서를 시작했다. 말미에는 곧은 충신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웠다고 적었다.

 선조의 열등감을 다룬 이야기는 전쟁이 끝난 뒤 선조가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이순신의 사람됨을 물었던 장면이 극화되면서다. 진린은 선조에게 "이순신은 천하를 다스릴 능력이 있고,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하늘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다"고 답했다. 천하를 다스릴 능력이 있다는 진린의 인물평을 조선 사대부 사회가 어떻게 해석했을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오늘의 이순신을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준 사람은 정조다. 정조가 아산에 있는 이순신 묘역에 세운 <어제이순신신도비>에는 친필 비명(碑銘)이 있다. 정조는 이순신의 비명을 쓰면서 진린의 인물평을 옮겼다.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다.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다. 진린의 인물평에 낯빛을 붉히지 않고 친필 휘호로 추존한 정조는 전국에 산재한 이순신의 기록을 모아 전집으로 묶었다. 지금 이순신의 기록이 온전히 남아 있는 이유다.

  마지막 한마디. 이순신은 휘하 군사에게 군사보고 4원칙을 실천하게 했다. "본 것은 본 대로 보고하라. 들은 것은 들은 대로 보고하라.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분해서 보고하라. 보지도, 듣지도 않은 것은 일언반구도 말하지 말라". 이순신이 목숨처럼 실천한 일상의 기준이었다. 허언과 억측, 과장이 난무하던 난세 속에서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cedar093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