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유배의 길에서 정약용의 정신을 만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이 보다 잘 살게 하려 힘썼던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다. 천재적 학식과 행정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과학, 사회, 의학 등 전 분야에 걸쳐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
진주 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정약용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다산은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화성을 설계했으며 서양 기술력을 도입한 거중기를 발명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크게 절감시켰다. 또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배를 연결한 ‘배다리’를 설계했다.
남인 계열의 학자였던 정약용을 파격 중용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남인 세력 제거를 위한 숙청을 단행한다. 1801년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사건인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됐다.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체포돼 경기도로 유배 보내졌다.
이후 정약용 조카사위인 황사영이 외국 군대를 동원해 천주교 신앙 자유를 얻으려했던 ‘백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정약용은 서울로 압송 후 강진으로 보내졌다.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됐다.
강진 유배 후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 고성사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의 집을 오가며 8년을 보냈고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解配)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간 다산초당에 머물렀다.

복원된 사의재 초가집 마당에는 겨울 햇살이 내려앉아 있고 다산이 마셨을 우물가에는 차가운 공기 속에 적막함이 감돈다. 주막 할머니의 배려로 겨우 몸을 뉘었던 그 좁은 방에서 조선의 천재는 절망을 딛고 학문의 기초를 다시 세웠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4년간 머물며 ‘경세유표’의 초안을 잡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의재에서 정약용은 어린이들을 위한 한자 학습서 ‘아학편’을 저술했다. 책에는 실용적인 교육관이 담겨있다. 또 주역 등 유교 경전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시작하며 ‘다산학’ 학문 체계의 서막을 열었다. 주막집 아들인 황상 등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며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다산초당 툇마루에 앉으면 강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곳에서 10년 넘게 머물며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마당 한편의 다조는 다산이 차를 끓이던 바위다 .
다산초당은 다산의 18년 유배 생활 중 가장 찬란한 결실을 맺은 장소다. 10여년간 다산이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이곳은 다산에게 학문적 해방구 역할을 했다.
다산초당의 건물은 원래 목조 초가였지만 1936년 노후로 붕괴돼 없어졌고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목조와가로 중건했다. 현판에 판각돼 있는 ‘다산초당’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 모각한 것이다.

사의재 시절이 기초를 닦는 시기였다면 다산초당에서 머물던 시절은 국가 제도 개혁안, 형법, 농업, 의학에 이르기까지 실용적 학문 체계를 완성한 시기다.
초당 옆에는 다산이 주로 거처하며 저술에 몰두하던 동암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20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쌓아두고 매일 글을 썼다. 또 다른 공간인 서암은 제자들이 공부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밤낮으로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산은 거처뿐 아니라 유배지 곳곳에서 지역 인사들과 소통하며 영향을 끼쳤다.

도암면의 ‘명발당’은 전남도 민속유산으로 지정된 해남윤씨 향촌파의 종택으로,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다산이 방대한 저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해남 윤씨 가문의 지원이 있었다. 다산은 외가인 해남 연동을 오가는 길에 해남윤씨 윤광택의 별장을 방문했으며 그 인연으로 강진 유배 기간에도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윤광택의 아들 윤서유는 사촌동생 윤시유를 통해 유배 중인 다산을 지원했다. 또 장남 윤창모를 다산초당으로 보내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이러한 인연은 혼인으로도 이어졌다. 다산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 윤영희가 이곳에서 혼인했다. 다산은 다산초당 동암에서 부인 홍씨가 보내온 빛바랜 붉은 치마를 잘라 그림을 그려 딸에게 보냈다. 활짝 핀 매화 가지에 새 한 쌍을 그려 넣은 이 작품이 ‘매조도’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다산의 출생부터 성장, 관직 생활, 유배 과정과 해배 이후의 삶을 시기별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몰입형 영상관에서는 다산의 유배 여정과 철학을 대형 스크린 속 화려한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분야별로 정리한 다산의 정수도 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외부 산책로는 다산초당으로 연결된다. 산길을 따라 약 15분간 도보로 이동하면 다산초당과 만덕산 지형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정약용이 외쳤던 부정부패 척결, 민본주의 사상, 실질적 복지 정책 등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행정학적 관점에서도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2년 유네스코는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해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실천한 인물로 공인하기도 했다.
/김다인·남철희 기자 kdi@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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