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살아난 하천서 불어온 ‘사람 사는 세상’ 바람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2026. 2. 22. 16:3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석환의 남강이야기
(44) 화포천과 노무현

낙동강은 창녕 남지에서 남강을 맞아들이고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창녕, 함안, 창원, 밀양과 경계를 이루며 흐른다.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경남도청이 있는 창원시와 낙동강이 맞닿은 구간은 약 25~30㎞ 정도. 낙동강은 창원 북쪽을 지나며 주남저수지를 거쳐 온 주천강을 받아들인다. 주남저수지는 원래는 자연 늪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가 되었다.

주천강을 품에 안은 낙동강은 곧바로 2시 방향으로 흘러 곧 국내 최대의 하천형 배후습지가 있는 화포천을 받아들인다. 김해 진례산에서 발원한 22㎞ 길이의 화포천은 2009년 한국하천협회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이름이 올랐다. 하지만, 2000년대 초까지 상류 공단의 폐수로 화포천은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고, 큰비가 내리면 습지 곳곳에는 떠내려온 쓰레기로 넘쳐났다. 일부 지역은 아예 폐기물매립장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죽어가던 화포천을 생태하천으로 되살린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국내 최대의 하천형 습지인 화포천. /김석환
2008년 2월 "아, 기분 좋다"는 말로 봉하마을 생활을 시작한 노무현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화포천의 생태계를 복원하고, 논에는 오리를 넣어 친환경 농업으로 되살리려 했다. 친환경 농업 시행으로 봉하 들녘과 화포천 습지의 생물이 다양해졌다. 멸종위기 동물인 수달과 황새들도 다시 등장했다.
친환경 생태농업을 하는 봉하 들녘의 허수아비. /김석환

노무현과 봉하 사람들은 마을 앞산에 김수로왕과 결혼할 당시 허황후가 예물로 가져왔다는 장군차 나무를 심었다. 기록상으로 한국 최초의 전통차인 장군차는, 하동이나 보성 녹차와는 다른 잎이 크고 두꺼운 남방 계통이다.

노무현은 서울이 아닌 '시골' 고향을 퇴임 이후 거주지로 택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까지 해본 시민으로서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봉하마을은 전국적 명소가 되었다. 한 해에 수십만 명이 봉하마을에 와 "대통령님, 나오세요"를 외쳤다. 아이러니였다. 그는 임기 내내 낮은 지지율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갈 데까지 가버린 대통령을 바라보며(2006.12.12. 조선일보)'에서 보듯 경멸과 무시는 일상이었다. 한나라당의 대변인이 노골적으로 "대학 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라고 할 정도였고, 2003년 3월 취임 12일 만의 '검사와의 대화'에서는 "83학번이냐"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고졸 출신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는 좌절 대신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개비를 가슴에 품고 바람을 맞으러 달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평생은 그렇게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노무현기념관의 해바라기 조형물. /김석환

그가 자주 썼던 말도 <장자(莊子)>에 나오는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였다. 2001년 12월 10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노무현의 연설은 지금도 비장한 울림이 있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 중략-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됐다.-- 중략--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 정치학자 마이클 존스턴에 따르면 한국은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 국가에 해당한다. 정치인과 법조인, 고위 관료, 재벌, 언론계 사주 등이 같은 지역, 같은 학교 출신 엘리트로 뭉쳐 부패 카르텔을 형성해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이권을 나눠 먹는 국가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이를 일상에서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정치적 외톨이가 된 그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왜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느냐는 가벼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법안이 새로 제출되거나 현안이 생기면 동료 의원들은 전화를 들어 배경 등을 물어본다. 그런데 나는 도통 전화할 곳이 없었다". 1946년 해방 이듬해에 '촌'에서 태어난 그는 '엘리트 카르텔'에 끼지 비천한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2004년 3월 12일, 국회 탄핵 의결이 있던 날에도 노무현은 창원의 지역 혁신보고회장에서 고려 시대 수도를 개경에서 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던 묘청과 정지상의 죽음 등을 예로 들며 수도 이전과 지역균형발전, 대한민국 주류세력의 교체에 대해 30여 분 이상 연설을 이어 나갔다. 엘리트 카르텔의 역린, 가장 두려워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관습 헌법'이라며 '경국대전'까지 인용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그의 원대한 꿈은 무산되었다.

최근 20년간 연평균 6만 5000여 명의 청년이 교육과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향한다. 수도권의 인구 밀집이 심해지는 만큼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 부동산 자산을 물려받지 못하는 청년들은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자 아예 '대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수도 이전과 지역 균형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한 후과였다.
봉하마을의 노무현 사저. /김석환

봉하에서 울려 퍼지는 "대통령님, 나오세요"라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엘리트 카르텔에게는 끔찍한 공포였다. 노무현의 정치적 영향력이 복원되면 다시 '지옥의 문'이 열릴 것만 같았다.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이 먼저 깃발을 들었다. 이들은 한나라당 김해시장과 시의원들이 제출, 통과시킨 예산안이 '노무현 아방궁'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언론은 봉하마을에서 1㎞ 이상 떨어진 화포천 생태환경 복원 사업비 예산 60억 원도, 6㎞ 떨어진 진영 공설운동장 개보수 예산 사업도 봉하마을 관련 예산이라고 앞다투어 보도했다. 김해시에서 하는 모든 사업은 노무현을 위한 것이라는 식의 광기 어린 보도였다. 나중에 박근혜 정부 초대 홍보수석이 되는 당시 문화일보 윤창중 논설위원이 "2008년 1월 31일 자 "노무현 캐슬"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노무현의 눈과 발이 닿을 공간이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 한 번 쓸 거라면 모조리 찾아내 혈세를 발라놓고 있다"고 쓰는 식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였던 홍준표도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처럼 아방궁을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은 없다"고 주장했다. 야비한 공격이었다. 아방궁이 아니라 실제는 가장 싼 집에 살았다. 2008년 2월 KBS '미디어 포커스'가 전임 대통령의 사저를 공시지가 기준으로 검증한 결과 전두환 15억 원, 노태우 8억 3000만 원, 김영삼 6억 6000만 원, 김대중 16억 원, 노무현 6억 5000만 원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검찰과 국정원 등 사정기관은 노무현과 친인척 등 주변 인물은 물론 자주 가던 음식점까지 탈탈 털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유서에 남긴 말이다. 그의 죽음은 그렇게 강요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거실, 뒤로 유서를 썼던 PC가 보인다. /김석환

우리나라 전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아기 장수' 설화가 있다. 아기 장수는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에서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탓에 관군에 의해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아기 장수'는 민중의 희망으로 다시 살아난다. 노무현도 그렇다. 심지어는 윤석열도, 이준석도 선거철이면 노무현을 좋아하고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노무현이 한국 사회에서 개혁과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윤석열, 이준석은 그 이미지만 갖고 싶어 했을 뿐, 노무현이 일생을 바친 국가균형발전과 지역 분권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2024년 한국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 1위는 노무현이었다. 노무현 31%, 박정희 24%, 김대중 15%였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이명박은 1.6%, 조사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윤석열은 2.9%였다. 2025년 갤럽조사에서도 가장 일을 잘한 대통령으로 노무현이 68%의 지목을 받았다. 생성형 AI 제미나이는 노무현이 재조명되는 이유에 대해 ① 탈권위주의와 리더쉽, ② 원칙과 가치를 중시한 정치 행보 ③ 국정 운영에 대한 재평가 ④ 서거 이후의 정서적 유대감과 부채감 등 4가지를 꼽는다.

2025년 월간 중앙 9월호는 소주와 맥주를 가득 실은 1톤 화물 탑차가 매주 윤석열 대통령실로 배달 다녔다고 보도한다. 노무현도 술을 좋아했지만 명징한 판단력 유지를 위해 재임 기간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이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그는 애창곡은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로 시작되는 '어머니(작사·작곡 미상)'였다.

'사람 사는 세상'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그는 벌써 우리 곁에 없다. 그가 없어도 봉하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생각하며 친환경 농법을 계속한다. 봉하 쌀에는 구수한 맛이 감돈다. '골든 퀸 3호'로 불리는 이 쌀 품종에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고고한 산인 히말라야 야생 벼의 '향(香) 유전자'가 들어 있다.

가을이 되면 그를 주제로 논 그림이 펼쳐진다. 어느 해의 논 그림은 이랬다.

"그대, 잘 계시나요?"
봉하 들녘의 노무현 논 그림. /노무현재단

/김석환 박사·지식 큐레이터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