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이야기] 29. 효종의 영릉
부실 공사로 파묘까지 겪은 영릉, 세종 영릉과 대비되는 풍수 입지

효종 영릉(寧陵)은 제17대 효종과 그의 비 인선왕후의 동원상하릉이다. 효종(孝宗)은 제16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이 끝난 뒤 인조 15년 1637년부터 1645년까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머물렀다. 1645년 소현세자가 귀국 후 갑자기 죽자,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병자호란 이후 민생 안정과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북벌정책을 추진하였다. 인선왕후(仁宣王后)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이다. 병자호란 후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있을 때 현종을 낳았으며 귀국한 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효종은 1659년 5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40세에 승하하였다. 효종 10년 1659년 5월 초부터 과로로 인하여 정사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침을 맞게 된다. 그런데 어의 신가귀가 진료 중 실수로 침을 잘못 놓아 출혈이 발생한다. 출혈을 멈추려 갖은 시도를 하였으나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결국 효종은 당일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어이없게도 효종에게 시침하였던 어의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다고 밝혀져 현종 때 교형에 처해졌다. 효종이 승하하자 능 택지(擇地)를 두고 현종의 왕권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신권이 충돌하는 장면이 두 달여 동안 수없이 나타난다. 5월 18일부터 시작한 풍수 논쟁은 7월 11일 동구릉 건좌(乾坐)의 산으로 결정하기까지 두 달여 동안 계속된다. 논쟁 중에 현종은 거리도 가깝고 흉도 없다며 수원으로 효종의 능지를 봉표한다. 현종이 수원으로 결정하자 송시열을 중심으로 수원 불가를 주장하면서 대신들의 반발이 시작된다. 왕과 대신들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흐르자, 윤강은 대안이자 절충으로 동구릉 건좌 산을 제시한다. 현종은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수원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동구릉으로 결정한다. 조선왕릉 택지 선정에 있어서 왕과 대신, 상지관, 심지어 상소를 통한 노비까지도 치열하게 풍수 논쟁을 하였다. 효종 승하 후 영릉(寧陵) 택지 결정 과정은 조선왕릉 중 가장 치열하게 논쟁한 왕릉이었다.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능 조성 이후 매년 봉분의 흙이 무너져 보토(補土)를 하는 등 보강하였지만 병풍석이 날이 갈수록 점점 기울어지고 무너지고 또 틈까지 생겼다. 게다가 병풍석에 장마철마다 물이 흥건하자 틈이 생겨 광중(壙中)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릉론이 불거졌다. 조성 14년 후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영릉 동쪽으로 천릉할 터를 정하고 능을 개장했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내부에는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흠이 없고, 토질은 정세(淨洗)하고 견고하며 색 또한 윤기가 있었고, 시신을 묻은 구덩이인 광중을 파니 마치 시루에서 나오는 기운처럼 훈훈하게 온기가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어이 영릉은 천릉을 했고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어이없게 효종의 영릉 천릉은 석물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엄석(掩石)이 없는 등 부실 공사가 원인이었다. 현종실록 21권, 현종 14년 1673년 10월 12일 1번째 기사를 보면 송시열은 개장 때 능의 흙을 한 자쯤 파헤친 뒤에 무덤 안에 이상이 없음을 알았지만 일을 맡은 신하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봉하자는 의논을 끝내 내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영릉 천릉 다음 해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효종 왕릉 아래에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형태로 인선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효종의 영릉은 한남정맥이 여주 북성산으로 들어와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으로 회전한 곳에 남향으로 잡은 왕릉터로 세종 영릉과 같은 지맥이다. 같은 지맥이지만 효종 영릉 본신맥은 세종 영릉의 남은 기운인 여기맥(餘氣脈)이므로 기운이 들어오는 역량이 세종의 영릉보다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의 영릉 안산과 효종의 안산을 비교하면, 세종 영릉은 회룡고조 중심선에 있고, 효종 영릉은 회룡고조의 중심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다. 중심에서 벗어난 입지이기에 회룡고조 주체인 앞산의 반사에너지 입력 영향력과 주변 사신사의 혈장에 대한 보호, 응축의 강도가 세종의 영릉보다는 많이 낮은 곳이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은 홍살문 밖에 금천교가 있으나, 효종 영릉 홍살문 안쪽에 금천교가 위치한 유일하고 특이한 구조이다.

조선왕릉 재실은 대부분 멸실되거나 원형이 훼손되었지만, 효종 영릉(寧陵) 재실은 그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조선왕릉의 대표적 재실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재실 뜰 안의 회양목은 보기 드문 큰 노거수로 그 생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매우 커 천연기념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영릉의 재실은 보물 제1532호,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종은 살아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자 '북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지만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건국 초기의 왕성한 청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단순한 구호에 그쳤다. 효종은 침을 맞다가 과다 출혈로 인하여 의료사고로 사망하였고, 죽어서는 능의 부실 공사로 파묘를 당하고, 수원 여기(餘氣) 터로 옮겨졌다. 훈훈한 기운이 올라올 정도로 좋은 터인 그 자리는 현재 증손자인 영조가 누워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