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가지치기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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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이건만 농사일로 바쁘다.
싹눈이 트는 봄에 나서야 할 매실나무 가지치기도 시작했다.
이번 주 안에 마무리하고 잠시 멈춘 약국 열던 건물 청소와 창고 정리도 마쳐야 한다.
왜 하필이면 소일거리가 힘든 농사일이냐고 의아한 눈치를 던지는 분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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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선 접골도 쉽지 않은 70세 중반에 웬 가당찮은 수술이냐는 눈치를 준다. 나도 수술 결심과 포기를 수없이 번복했으니까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영아기 때 앓았던 고관절 염증으로 고관절이 녹아 없어졌고 6·25전쟁 중이라 수술 시기를 놓친 채 그럭저럭 75년을 살아왔다. 한데 나이의 숫자가 늘수록 육신의 감가상각 수치도 증가한다는 사실을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진통제의 양과 복용 횟수가 점차 늘더니 그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 약국 건물 방수 공사로 지하실에서 3층 옥상까지 무리하게 오르내린 탓이다. 고관절 통증이 심해져 실내에서도 지팡이를 짚어야 편할 정도다. 근육이 받쳐주던 정강이뼈가 좌골(궁둥뼈)까지 밀려 올라왔기 때문이란다. 힘든 공사는 끝났으니 부동산 관리도 배울 겸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서 내려와 도와달라고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몸 아껴 쓰랬는데~ 인부 사서 일 시키면 돼지~'하는 지청구뿐이다. 농사든 건물 청소든 지시하는 것도 주인이 현장에 함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진통제를 먹으며 밭일하는데 내가 어쩌다 수술 지경까지 왔나 한심하고 야속한 마음에 뜨거운 액체가 쉴 새 없이 얼어붙은 양 볼을 가른다.
아내와 주변 약사님들과 수술 담당 의사 선생님은 이제라도 10년 앞을 내다보는 현명한 결심을 했다며 격려한다. 수술하지 않은 상태에서 더 나이가 들면 목발이나 휠체어 신세를 면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 달리기이듯 인간 사회활동의 기초는 걷는 일이다. 100세 장수 시대에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소일거리가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필요하다. 왜 하필이면 소일거리가 힘든 농사일이냐고 의아한 눈치를 던지는 분들도 있다. 농사로 대를 이어온 농부의 자식이어선지 밭 가운데 서서 풀과 흙 내음을 흠뻑 맡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어쩌겠는가.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건강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늦었지만 수술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아내는 명절 때마다 6·25전쟁 중 학도병으로 숨진 삼촌을 비롯해 현조까지 열한 분의 차례상을 차린다. 평소엔 증조까지 기제사를 모시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까지 모셔 온 아내가 지난 추석 때 가족 앞에서 모든 제사 포기를 선언했다. 후손들 잘살게 도와준 조상님이라며 흠모하던 아내였지만 무릎과 허리 통증 때문에 이젠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장남인 나로선 난감했다. 하지만 아무도 제사를 모셔가겠다고 나서는 자손은 없다. 결국 350년 전 만수동에 정착하신 광원 할아버님의 11대손인 내 대에서 조상의 제사를 끝내야 하나 보다.
입원하러 가기 전 날 아침 이발을 한 후 정갈한 마음으로 열한 분의 위패를 세필 붓으로 한지에 옮겨 모셨디. 아내가 준비한 떡국과 청주 한 잔을 마음을 다해 올렸다. 조상님들이여. 굽어살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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