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그림도 여행이다'···김영화 작가의 온기나는 여정
고등학교 이후 50여년 그림 외길
1980년대 ‘대동세상’ 작품 전시
붓 밑그림 이후 나이프로만 작업
힘든 아내에 그림으로 위로 계기
따뜻한 동심 자극하는 작업 몰두
50여 회 전시회 통해 작품 선봬
“삶이 힘든 이들에 희망 전하고파”

소년은 냇가에서 친구들과 물수제비 뜨기를 했다. 소년은 최대한 둥글고 얄팍한 돌을 고르고는 상체를 약간 숙인 채 힘껏 물의 수면을 향해 던졌다. 돌은 튀는 자리마다 작은 포말을 일으키며 물결을 만들더니 멀리 사라졌다. 와~, 친구들이 부러운 듯 환호성을 질렀다.
수박 서리는 가장 재미있는 놀이였다. 소년은 친구들과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서리에 나섰다. 슬금슬금, 숨을 죽인 채 적당한 수박을 들고 얼른 내빼면 되는 일이었다. 아뿔싸,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한 녀석의 덜미를 붙잡곤 했다.
가장 즐거운 시간은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갈 때였다. 지글지글 기름에 튀겨지는 부침개, 뭉게뭉게 하얀 여기를 뿜어대는 찐빵, 작은 됫박에 산처럼 쌓인 형형색색의 알사탕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침샘을 자극했다. 소년은 알사탕 앞에서 한동안 머뭇거렸지만 엄마는 등짝에 매운 손맛만을 전해줄 뿐이었다.

저마다 온기 뿜어내는 그림…유년 기억 속으로
작가의 작업실은 겨울 추위가 차갑게 몰아치던 바깥과 달리 아늑하고 따뜻했다. 별다른 난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리저리 거충 훑어봐도 눈에 띄는 기구는 없었다. 중앙에 자리를 잡고 낮게 졸고 있는 작은 전기난로만이 겨우 한기를 달래고 있을 뿐이었다.
작업실에서 전해지는 온기의 출처를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작가의 작품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온기를 뿜어내고 있어던 것이다. 고향에 대한 추억과 즐거웠던 여행 이야기 등을 담은 크고 작은 작품들은 파스텔톤의 다양한 색채와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유년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얕은 시냇물에 발을 담근 채 천렵하는 가족을 보면 미꾸라지를 잡고 물수제비를 하던 기억이 떠오르고 가지런히 정돈된 밭의 가장자리에 들어선 원두막을 보면 수박 서리가 생각났다. 크지 않은 손수레에서 무엇인가를 파는 사람, 이발소와 약방 등에서 분주한 사람들은 엄마 손에 이끌려 따라갔던 전통시장의 활기찬 모습과 오버랩됐다.

“가족 그림 작가로 자리매김”
작가는 고등학생 시절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 그림을 운명처럼 여기며 붓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대학생이던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는 대한민국이 격동에 휩싸인 시기였다.
그는 사회적인 관심과 흐름을 반영해 ‘대동세상’이란 작품을 완성했다. 모두가 함께 한다는 ‘대동’이란 의미 속에 탈춤을 활용한 민속적인 표현으로 사회의 안녕과 민족정신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때 완성한 작품은 뜻을 함께한 젊은 작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통해 선보였다.
작가가 어렵게 꾸린 가정은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작가에게 가장 힘들었을 때는 자녀가 한창 성장하던 시기였다.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에서는 한 번씩 목돈이 들어가야 하는 데 경제적인 여력이 부족해 이른바 ‘카드 돌려막기’로 가정을 꾸려가야 했다. 그때 힘이 된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지출을 줄이면서 어려운 시기를 지혜롭게 견뎌낼 수 있었다.
작가는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힘든 아내에게 ‘가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물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실천했다.

희망·행복 노래한 여행과 가족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여행’과 ‘가족’이다. 그는 여행을 통해 작품의 영감을 찾고 꾸준히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여행의 이야기를 담은 풍경화나 가족의 사랑을 담은 연작, 화면을 분할해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은 궁극적으로 희망과 행복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작가는 붓으로 밑그림을 한 뒤 나이프로만 작업을 진행한다. 칼날을 옆으로 하느냐, 세워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를 뿐 아니라 다양한 색의 느낌까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나이프를 사용하는 이유다. 차갑고 무서운 칼날이 작가의 손에 의해 따뜻하고 순수한 동심의 빛깔을 빚어내는 셈이다.
작가의 여행에는 고향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행에서 겪는 여러 가지 추억쌓기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며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작가의 그림은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불편함을 덜어줘 편안함부터 느껴진다. 구도나 원근법이 무시된 산과 바다, 길, 사람과 나무, 새는 어렸을 때 감성을 자극한 동화책이나 친구들과 그린 마을 지도처럼 구성돼 친근감을 준다. 나무는 세월의 상징이며 길은 어디를 가더라도 만나고 다시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길과 길 사이에 놓여진 다양한 이미지들은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6년 전부터 아내와 함께 차박여행을 즐기고 있다.
똑같이 여행이 취미였던데다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는 이점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차 속에서 생활하면서 먹고 보는 여행의 재미도 적지 않지만 이 과정에서 작업하고자 하는 소재나 표현 기법 등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다. 동해안이며 서해안,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두루 돌아다닌 경험은 카메라 앵글이나 머릿속을 벗어나 한층 더 감성을 자극하는 그림으로 형상화됐다. 최근에는 2박3일 일정으로 여주와 충주를 다녀오기도 했다. 여주의 영녕릉, 충주의 경종태실 등을 둘러보며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인생도 그림도 여행이다
작가는 그동안 50회가 넘는 작품 발표를 통해 꾸준히 관람객과 소통해 왔다.
작품 세계는 가족과 여행을 통해 희망과 행복을 일관되게 노래하면서도 전체적인 색감은 최근 들어 한층 밝아졌다. “나이를 먹고 삶에서 마음의 여유가 생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드러난 현상인 것 같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지난 2024년 4월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동행’은 작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전시회였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한 한국인이 당초 큰 작품을 구입하고자 했으나 운반에 제약이 따르는 바람에 소품 한 점을 사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한 달 후쯤 일어났다. 사업차 다시 한국에 들어온 그가 처음 본 자신의 작품을 잊지 못하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다시 찾아준 그가 고마워 작품을 직접 들고 서울로 올라가 전달했다.
광주라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이기는 하지만 중앙에서 전시회를 하다 보니 좀 더 폭넓은 관객과 소통하게 됐다는 점에서 무척 기쁜 일로 기억됐다.
지난해 11월에는 광주 송정작은미술관에서 초대전 ‘추억 나들이-고향을 찾다’를 가진 바 있다. 여행과 가족,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평가다.
작가의 전시회는 올해도 이어질 예정이다.
‘여행은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는 말처럼 작가는 인생과 그림 모두가 결국은 여행이라고 생각하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이프를 들고 희망과 행복을 노래하고자 한다.
“그동안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은 곧 그림이다’라는 생각에서 진행해왔던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관람객과 시민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과 행복을 보여드리고 싶고, 전달하고 싶습니다.”
글·사진=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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