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가짜뉴스’ 대한상의만 혼날 일인가? [HERI 초점]


“대한상의의 목소리는 바르고, 옮고, 정확해야 합니다.”
2014년 9월 박용만 당시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 회장이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강조한 말이다. 취임 1년을 맞아 대한상의의 기본 원칙을 분명히 했다. 그는 재임 중 바쁜 일정 속에서도 공식자료는 발표 전에 꼭 읽고 내용을 확인했다고 한다. 한 대한상의 직원은 “시원치 않은 내용을 내보내려 하면 혼이 나니까 숫자놀음을 할 생각을 안했다”고 말했다.
대한상의가 ‘상속세 가짜뉴스’ 파동으로 초상집 분위기다. 지난 2월3일에 내놓은 보도자료가 발단이다. 영국 이민 컨설팅사인 헨리앤파트너스의 보고서를 인용해 “한국의 고액 자산가(100만달러 이상) 순유출이 2025년 2400명으로 급증해 세계 4위”라고 발표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고의적 가짜뉴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임광현 국세청장은 “최근 3년간 해외 이주 신고자 전수조사 결과 자산 10억원 이상은 연평균 139명에 불과하다”고 ‘팩트’로 반박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도 대한상의를 겨냥해 ‘응당한 책임’과 ‘단호한 조처’를 강조했다.
대한상의는 통계 인용 시 지켜야 할 기본을 소홀히 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헨리앤파트너스의 통계는 근거가 불분명한 추정·전망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한상의는 아무런 사실 확인 없이 인용했다. 애초 공신력이 떨어지는 민간업체의 발표를 맹신한 것부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대한상의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높은 상속세가 유출의 주된 원인”이라는 자의적 해석까지 덧붙였다. 원래 보고서에는 없는 얘기다. 대한상의는 2025년 4월에도 헨리앤파트너스를 인용해 비슷한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다. 당시에는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아, 운 좋게 넘어갔다.
2025년 6~7월 영국 신문인 가디언과 파이낸셜타임스, 비영리단체 ‘조세정의 네트워크’ 등이 헨리앤파트너스 통계의 신뢰성에 잇달아 의문을 제기했다. 국내에서도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이 10월말 국정감사에서 구윤철 부총리를 상대로 한 질의에서 “신뢰도가 의심스러운 자료에 근거해 한국의 유력 언론들이 객관적 사실을 호도하는 보도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대한상의는 눈에 뭐가 씌었는지 국내외에서 제기된 이런 비판을 모두 간과했다. 그때 통계의 신뢰성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검증했다면, 지금의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상의는 과거 보도자료 관련 큰 논란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일까? 박용만 전 회장은 8년 전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대한상의는 역사가 130년이 넘고, 회원이 14만여 기업과 단체에 이르며, 국제 네트워크까지 갖춘 국내 최대 법정 경제단체”라며 “회원사들의 눈앞의 이익만 좇기보다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회원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대한상의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기본 원칙이 희미해졌다. 다른 경제단체와 함께 무리를 지어 회원사의 이익만 좇는 일이 늘어났다. 국민경제와 국민의 이익은 뒷전으로 밀렸다. 소수 부자들을 위해 상속세 인하를 주장하고, ‘코스피 5000시대’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상법개정에 반대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그 과정에서 신뢰하기 힘든 통계까지 동원하는 자충수를 뒀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내부서신에서 “취임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조직 문화를 개선하고, 신뢰를 회복하는데 모든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옳은 얘기다. 다만 두루뭉술하게 넘겨선 안된다. 최 회장의 초심이 무엇인지, 대한상의의 책임과 의무,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한국경제인협회, 한국경총 등 다른 경제단체들은 헨리앤파트너스 자료를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높은 상속세가 기업 승계를 가로막고, 투자 축소와 자본유출을 초래한다는 ‘제 논에 물 대기’식 과장된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왔다. 대한상의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부의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는 엄중한 현실은 안중에도 없다. 민간 이익단체인 이들은 법정단체인 대한상의와 차이가 있다. 하지만 회원사와 기업인의 이익만 우선시하며, 국가경제와 국민에게 해가 되는 일까지 서슴없이 주장하는 행태는 경제단체로서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한다.
한국 보수언론은 ‘상속세 가짜뉴스’의 공범들이다. ‘“50% 웃도는 상속세 낼 바에” 부자 2400명 한국 떠났다’(조선일보), ‘“상속세 50% 못내” 한국 떠나는 수퍼리치들…세계 4번째 규모 이탈’(중앙일보), ‘50% 넘는 상속세에…부자 2400명 한국 떠났다’(동아일보) 보수언론은 국내외에서 헨리앤파트너스 통계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잇달아 제기됐는데도 팩트 확인을 외면했다. 대신 ‘가짜뉴스’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앞장섰다. 언론의 기본을 망각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 이후 정부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와 같이 빨랐다. 국세청이 지난 3년간 해외 이주자를 전수조사하는 데 불과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헨리앤파트너스를 인용한 가짜뉴스가 국내에 처음 보도된 것은 2024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 정부가 출범한 2025년 6월 이후에도 유사 보도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문제를 지적할 때까지 정부는 아무런 대응을 않고 방관으로 일관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국감에서 가짜뉴스 관련 질의까지 받았는데도 뒷짐만 지고 방기했다. 정부는 대한상의가 법정단체임을 강조하며 추상같은 질책을 쏟아냈다. 국정을 책임지고, 대한상의의 감독을 맡은 정부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작다고 할 수 있나? 구 부총리가 대한상의에 팩트 확인을 한번이라도 요청했다면, 이번 참사가 벌어졌을까?
최태원 회장은 전체 대한상의 임원의 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산업부도 대한상의 감사를 신속히 끝냈다. 대한상의의 책임은 무겁다. 하지만 상속세 가짜뉴스 사태는 대한상의에만 모든 책임을 지우고 끝낼 일이 아니다. 가짜뉴스가 버젓이 횡행하는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구조를 바로잡고 정상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가짜뉴스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온 경제단체와 보수언론의 유착구조를 끊어야 한다. 또 이를 방관하며 직무를 유기한 정부도 제대로 책임지고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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