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전봇대 그 스티커, 미술관에 들어오다…OCI미술관 지알원 개인전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6. 2. 22.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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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세대 그라피티 작가
비주류 예술가 초상화부터
뜯어낸 벽화·스프레이 캔 전시
미술관 흰 벽에 동료와 낙서
25년 활동 기록 한자리에
지알원의 ‘Defrag - Stickers’(2025) (부분) <OCI미술관>
홍대나 이태원의 낡은 전봇대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다면 한 번쯤 마주쳤을 스티커가 있다, ‘지알원 왔다감’이라고 쓰인 스티커다. 도시 곳곳에서 궁금증을 유발하던 이 낙서의 주인공이 거리의 담벼락을 넘어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 1세대 그라피티 아티스트 지알원의 개인전 ‘Grrr!’가 서울 종로구 OCI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지알원의 ‘개들이 짖는다’(2025) <OCI미술관>
전시명 ‘Grrr!’은 들개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형상화한 의성어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대형 신작 ‘개들이 짖는다’는 네 마리의 들개가 포효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는 작가가 오랫동안 주목해 온 주변부의 존재들을 상징한다.
지알원의 ‘People, Like This - JEONG YEAWON’(2025) <OCI미술관>
작가의 시선은 늘 화려한 중심부보다는 그늘진 골목에 머문다. 전시장 1층을 채운 대형 초상화 연작 ‘People, Like This’가 대표적이다. 타투이스트, 펑크 뮤지션, 코스플레이어, 삼바 연주자 등 각자의 영역에서 묵묵히 자기 빛을 내는 비주류 문화인들을 캔버스에 담았다.

붓 대신 그라피티용 스프레이와 마커를 사용해 벽화 특유의 거친 질감을 살렸다. 작품 사이는 골목길처럼 배치돼 마치 길 위에서 지인들을 마주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지알원의 ‘Archives 2000-2025’(2025) <OCI미술관>
지알원의 작업은 1999년 고등학생 시절 그린 첫 스케치 ‘KOREA’에서 시작됐다. 2000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거리에서 그라피티를 그리기 시작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홍콩 등을 누비며 흔적을 남겼다.

전시장에 마련된 ‘아카이브 2000-2025’에는 지난 25년간 그의 활동상이 사진으로 빽빽하게 담겼다. 시카고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폐공장에서 그라피티를 그리다 기물 파손 혐의로 체포돼 이틀간 구금되었던 기억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알원의 ‘Defrag - Cans, Walls’(2025) <OCI미술관>
그는 단순히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집에도 집착한다. 다 쓴 스프레이 캔을 찌그러뜨리고, 거리에서 뜯어낸 그라피티 벽화 조각을 붙여 만든 부조가 눈에 띈다. ‘지알원 왔다감’이라는 자신의 스티커와 동료 예술가들의 스티커들을 캔버스에 다닥다닥 붙인 작업은 휘발되기 쉬운 거리 예술을 영속적인 기록으로 변환하려는 집념을 보여준다.
지알원의 ‘Osakascape - JUSTMEET’(2025) <OCI미술관>
재일교포 3세 그라피티 아티스트이자 오랜 친구인 ‘저스트 미트’(시모무라 코이치)를 조명한 미디어아트와 회화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 오사카에서 살아온 그의 가족사를 통해 경계에 선 인간의 삶을 그려낸다.

미디어아트 작업에는 저스트 미트가 할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를 찾아, 조부가 살았던 집을 방문하고 인근에서 친척과 극적으로 상봉하는 장면이 담겼다. 가족의 기억과 디아스포라의 뿌리를 찾는 과정을 영상으로 풀어냈다.

지알원의 ‘New Garden’(2025) <OCI미술관>
설치 작업 ‘New Garden’ 역시 결을 같이 한다. 합판에 식물을 그려 정원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오각형 모양으로 잡초를, 육각형 모양으로 고목을 표현했다. 남은 삼각형 모양의 자투리 합판으로는 삐죽삐죽 자라나는 이름 없는 풀을 형상화했다. 변두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다.
그라피티 아티스트 지알원이 지난 11일 OCI미술관에서 자신의 작품 ‘개들이 짖는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유정 기자>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1세대 그라피티 아티스트로서의 고민도 전했다. 그는 “그라피티 문화가 더 활발히 교류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다”며 “후배들이 우리 때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예술적 고민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나의 숙제”라고 말했다.

정유연 OCI미술관 선임 큐레이터는 “지알원은 지워질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남기고, 사라질 것을 알기에 끈질기게 기록해왔다”며 “작가가 회화로 풀어낸 거리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순수미술로 연결되고, 이야기를 가진 그라피티는 더 이상 즉흥적 흔적에 머무르지 않고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 언어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지알원의 ‘New Garden’(2025) (부분) <OCI미술관>
1층부터 3층까지 이어지는 미술관 계단 벽면 곳곳에는 작가가 그의 동료와 남긴 실제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다. ‘지알원 왔다감’ 스티커도 전시장 곳곳에 숨어 있다. 이는 태깅(Tagging)으로 그라피티 문화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닉네임을 거리의 벽이나 시설물에 남기는 행위를 뜻한다.

거리의 전유물이었던 태깅이 제도권 미술관의 흰 벽면에 새겨지며 발생하는 묘한 쾌감은 이번 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백미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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