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왕’이 된 세탁소 집 아들 이야기…한인 이민 120년의 숨겨진 기록(2) [홍키자의 美쿡]

1970년대, 이민법이 바뀌고 한국인들이 미국에 쏟아져 들어왔을 때, 이 두 곳은 ‘버티는 공간’이었습니다. 델리(간이 식당), 세탁소, 네일숍…. 영어가 안 되니까 몸으로 때웠고, 자본이 없으니까 서로 계를 돌려 필요한 돈을 조달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금씩 살만해지기 시작하면, 근본적인 질문이 바뀝니다. “어디서 버틸 것인가”에서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로. 그 답은 바로 맨해튼을 마주보는 허드슨강 건너에 있었습니다.
미국 뉴저지주, 팰리세이즈 파크.
면적 1.2제곱마일(약 3㎢, 여의도보다 조금 큰 면적). 인구 약 2만 명인 이 도시 구성원의 53.7%가 한인입니다. 미국 전체에서 한인 비율이 절반을 넘는 유일한 도시입니다.

1980년대까지 이 동네는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독일, 그리스 이민자들의 동네였습니다. 빈 상가가 많았고, 집값은 저렴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한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플러싱에서 자리 잡은 1세대가 아이들 교육을 위해 허드슨강을 건넜고, 뉴저지로 왔습니다.

팰리세이즈 파크의 집값 중간 가격은 약 80만 달러. 우리돈 11억 원 가량입니다. 듀플렉스가 대부분인 이 동네는 듀플렉스를 사면, 한 층에 세입자를 들입니다. 월 렌트비 2100달러. 연간 2만5000달러. 이 돈을 바탕으로 모기지의 절반 가까이를 갚을 수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팰리세이즈 파크 주민의 63%가 세입자입니다. 그런데 그 건물 주인은 바로 한 층 위에 사는 한인입니다.

1세대가 번 돈이, 2세대의 학비가 되고, 다시 부동산 자산까지 됩니다. 한 세대 만에, 노동이 자본이 되는 구조가 바로 팰리세이즈 파크의 문법인 셈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조셉 배(배용범)입니다. 세 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1.5세대죠. 하버드를 졸업하고, 골드만삭스를 거쳐, 1996년 KKR에 입사합니다. KKR은 세계 3위 사모펀드로, 운용 자산만 5000억 달러에 육박합니다.

코리아 파이낸스 소사이어티(KFS)는 한인 금융인 대표 네트워크입니다. 회원은 3000명이고, 펠로우십 프로그램 참가자 250명입니다.
큐송 리(이규성) 칼라일 그룹 전 CEO나 마이클 채 블랙스톤 CFO도 대표적인 한인 금융인입니다. 이들은 자본을 운용합니다. 미국 연기금 자금이 흘러가고,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자리에 한인이 앉아 있습니다.
H마트(한아름마트)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82년, 뉴욕 퀸스 우드사이드의 작은 코너 가게에서 한인(권일연)이 창업했죠. 그리고 2024년 기준 미국 전역에 97개 매장을 가진 북미 최대 아시아 마켓 체인이 됐습니다.
H마트 고객의 30%는 놀랍게도 비아시아계입니다. 김치를 사러 오는 백인, 고추장을 찾는 히스패닉. 한인 슈퍼마켓이 미국인의 장바구니를 바꾸고 있습니다.
2024년 11월에 미국 역사상 첫 한인 연방 상원의원 앤디 김이 뉴저지에서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상원 의원 앤디 김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로컬 정치입니다.
2012년, 팰리세이즈 파크 투표용지에 한국어가 인쇄되기 시작했습니다. 2015년에는 숀 리가 이 동네 최초의 한인 경찰 상사가 되고요. 같은 해에 지나 김(김세윤)이 행정 서기관이 됩니다.
2019년에는 크리스토퍼 정이 뉴저지 버겐 카운티 역사상 최초의 한인 시장이 됐죠. 지금 팰리세이즈 파크 시의회 구성원을 보면 시장 포함 7명 중 6명이 한인입니다.

언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국에는 보통 토요일마다 교회 등지에서 열리는 한글학교가 약 1000개가 있습니다. 등록 학생은 6만여 명에 달합니다.
1980년대의 미국 대학 한국어 수업을 들어보면, 수강생 거의 전원이 교포 2세였습니다. 부모님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배우는 언어였죠. 한글학교는 토요일을 빼앗아 가는 짐이었습니다.
2020년대 들어 상황이 뒤집어졌습니다. 지금 미국 대학 한국어 수강생의 80%는 비(非)한인입니다. BTS 가사를 이해하고 싶고, 넷플릭스 자막 없이도 한국 드라마를 보고 싶은 이들이 한국어를 수강합니다.

1세대에게 한국어는 생존의 도구였습니다. 영어를 못하니까, 한국어로 버텼습니다.
2세대에게 한국어는 경쟁의 장애물이었습니다. 영어를 완벽하게 해야 살아남으니까 억양(액센트)은 지워야 할 흔적이었습니다. 3세대에게 한국어는 선택입니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 배웁니다. 할머니와 대화하기 위해 듀오링고를 켭니다.
버려졌던 언어가 다시 선택되는 순간, 이민은 더 이상 이민이 아닙니다. 언어가 바뀌는 순간, 뿌리가 된 겁니다.
이 문서에 처음으로 김치가 포함됐습니다. ‘장 건강에 좋은 발효식품’ 항목. 사우어크라우트, 케피어, 미소와 함께입니다.

1세대 한국인들은 플러싱에서 버텼고, 세월이 흘러 2세대와 함께 팰리세이즈 파크에 정착했습니다. 이제는 워싱턴에서 법을 만들고, 월스트리트에서 자본을 굴립니다. BTS와 블랙핑크로 대변되는 K신드롬은 그 다음에 온 것입니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뿌리는 화려한 곳에 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뿌리 위에 선 사람들이 지금 미국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2부>에 앞서, <1부> 기사도 있습니다.
“왜 서울대 의사는 뉴욕에서 세탁소를 열었나?” 한인 이민 120년의 숨겨진 기록(1)
링크▶ https://n.news.naver.com/article/009/0005639428?type=journal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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