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예술의 의미’ 묻는 가족 영화, 아카데미에 스며들다
요아킴 트리에르 ‘센티멘탈 밸류’ 클로이 자오 ‘햄넷’ 잇따라 개봉

예술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예술은 상실과 상처로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이 고답적인 질문이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영화 두편이 극장에 도착했다. ‘도파민’이 엔터테인먼트를 장악한 이 시대에 관객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는 ‘카타르시스’의 가치를 절실하게 확인해주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다음달 열리는 제98회 아카데미시상식을 앞두고 ‘씨너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등 스케일 크고 화려한 경쟁작들 사이에서 각각 9개와 8개의 주요 부문에 후보를 올린 ‘센티멘탈 밸류’와 ‘햄넷’이다.
18일 개봉한 ‘센티멘탈 밸류’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의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이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전작에서 주연을 맡아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레나테 레인스베가 다시 주연을 맡았다.
영화가 시작되면 대극장 무대에서 주인공을 맡은 노라(레나테 레인스베)가 공연이 시작된 뒤에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며 출연을 거부하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다. 연극배우로 성공했지만 내면의 고통을 지고 사는 인물임을 드러내는 장면 뒤에 이어지는 건 그 고통이 어린 시절 가족을 떠난 아버지에게 기인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어머니의 장례식 뒤 추모 모임이다. 수십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영화감독 아버지는 노라에게 신작 영화의 주연을 맡아줄 것을 제안한다. 노라는 단칼에 거절하지만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들이 꿈틀거린다.

‘센티멘탈 밸류’는 가족이라는 틀 아래 놓여 있는 인물들이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또한 예상치 못한 위로로 삶을 버텨나갈 힘을 주는지 놀라울 정도로 다층적이며 풍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를 위해 감독은 이 가족들이 살았고 엄마의 유산으로 남은 집을 중요한 캐릭터로 사용한다. 고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할머니가 태어났으며, 노라와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 자매의 아버지인 구스타브(스텔란 스카르스고르드)가 외롭게 성장해 신혼살림을 차리고 두 딸이 자라나는 걸 지켜봤지만 끝내 떠나버린 집. 남들이 보기엔 그저 1930년대 건축양식을 유지하는 고풍스러운 집이지만 거실 벽에 난 금처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 사이의 균열과 슬픔을 묵묵히 지켜본 관찰자이면서 영화의 제목인 ‘센티멘탈 밸류’다. 센티멘탈 밸류란 남들에게는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개인에게는 특별한 역사와 감정이 담겨 있는 정서적 가치 또는 그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화가 칸에서 공개됐을 때 요아킴 트리에르가 기자회견에서 “다정함은 새로운 저항 방식이다”(Tenderness is the new punk)라고 발언한 게 큰 화제가 됐다. 그는 “폭력의 시대에 부드러움과 희망의 공간을 찾아야 함을 느낀다”며 “‘당신이 그런 말을 했으니 당신을 무너뜨리겠다’가 아니라 ‘내가 오해했나?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자’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센티멘탈 밸류’는 이러한 철학의 예술적 결정체다. 가족끼리 상처받고 용서하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이처럼 성찰적이고 성숙한 위로를 담은 영화는 만나기 힘들다.

25일 개봉하는 ‘햄넷’ 역시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가족의 상처와 상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명대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탄생시킨 ‘햄릿’의 탄생 뒷이야기를 그렸다. 셰익스피어에게 ‘햄넷’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이 아들이 어린 시절 병으로 죽고 7년 뒤에 ‘햄릿’이 완성됐다는 점, 햄넷과 햄릿은 같은 이름이라는 역사 기록에 상상력을 덧댄 매기 오패럴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으며 오패럴은 감독 클로이 자오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참한 신부가 되기보다 자연을 뛰어다니며 분방하게 살아온 아녜스(제시 버클리)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인 윌리엄 셰익스피어(폴 메스컬)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큰딸과 아들딸 쌍둥이를 키우며 지내던 부부는 아버지와의 갈등, 작가가 되기 위한 열망으로 셰익스피어가 런던으로 떠나며 헤어져 살게 된다. 열병 유행으로 어린 햄넷이 세상을 떠나자 아녜스는 엄마로서 자책감과 부재했던 남편에 대한 분노로 고통에 빠진다.

‘햄넷’은 ‘노매드랜드’(2020)로 오스카 감독상을 탄 클로이 자오의 명불허전 연출력에 감탄하게 되는 작품이다. 거대한 나무 뿌리와 자연의 힘을 여성과 모성으로 연결시키는 화면 연출과 감정적 깊이를 담는 솜씨에서 거장의 손길이 느껴진다. 비의로 가득 찬 자연의 생기를 마치 자신이 그 일부가 된 것처럼 연기하고 후반부에서 자식 잃은 어미의 참절비절한 고통을 씹어내는 제시 버클리 역시 압도적이다. 여느 때보다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앞선 후보를 단 한명 꼽는다면 여우주연상의 제시 버클리라는 데 이견이 없을 듯하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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