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심판' 받은 1세대 현대건축…문화로 남고 커피향으로 다가갔다 [커피와 공간 '끽(喫)']
건축의 역사이자 현재의 건축을 보여주는 기록물
문화유산을 지켜내는 방법…카페·박물관 등 쓰임

[파이낸셜뉴스] "건축의 가장 준엄한 비판자는 시간이다."
우리나라 1세대 현대건축물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그리고 남겨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정인하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 2014년 9월 문화재청이 후원하고 한국근대건축보존회인 도코모모코리아,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는 제13회 도코모모세계대회를 위해 한국에 온 해외 건축가들도 '시간'의 비판을 버텨내며 한국 건축의 역사를 쓴 건축물을 둘러 봤다.
조선시대 5대 궁궐 등 한국하면 으레 떠오르는 건축물이 아니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율곡로 아라리오뮤지엄,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등을 봤다.
그들은 왜 이곳을 찾았을까.

물음의 답은 해외 건축가들이 한국을 찾기 10개월 전인 2013년 11월 한 기자회견 장소에서 알려줬다.
문화계 인사들은 한 공간에 모여 김수근의 공간사옥을 지켜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장인 당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현대 건축물 중 100년쯤 뒤 살아남을 건물이 몇 채나 될지 모르겠다"며 "공간사옥은 국보가 됐든, 보물이 됐든 국민 모두가 공유해야 할 20세기 최고의 문화유산"이라며 지켜야 할 이유를 말했다.
이듬해 가을 해외 건축가들은 6시간에 걸쳐 한국의 근·현대 건축사의 맥을 보여주는 대표 공간들을 목격했다. 그중 하나가 주인이 바뀌면서 아라리오뮤지엄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 공간사옥이었다.
당시 호주건축가 나이저 루이스는 “모더니즘 건축은 세계 어디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은 다른 것 같다”며 감탄했다.

도코모모코리아 관계자도 “우리는 일제강점기 때 근대를 맞으면서 근·현대 건축 양식도 유럽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다르게 나타났다"며 "일본은 유럽의 건축 양식을 일본화해 한국에 알렸는데 건축적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시기에 김수근, 김정수, 김중업, 나상진 등의 건축가들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과 건축 기법을 고민했다”고 첨언했다.
한국의 1세대 현대건축가들이 세운 건축을 남겨야 한다는 움직임은 '건축문화유산'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단국대 이범재 명예교수는 "건축을 건축으로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건축은 종합 예술이며 문화"라고 단언한 뒤 "'유산'이 된 우리나라 근·현대 건축물을 사람들이 계속 경험할 수 있도록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969년부터 82년까지 김수근을 사사하며 공간건축에서 설계실장, 연구실장 등을 역임했다.
이상림 공간종합건축사무소 대표도 "지금은 우리 국민의 절반이 아파트에 산다. 비슷한 패턴의 공간에 살면서 집은 그저 잠자고, 밥 먹고, TV 보는 곳이 됐다"면서 "그런 점에서 근·현대 건축은 공간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라고 공감했다.
특히 1세대 현대건축이 문화유산을 넘어 현재의 건축을 바라보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왔다.
임태병 문도호제 소장은 "김수근, 김중업은 외국에서 배운 걸 한국화하는 고민을 했다면, 국내파인 나상진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건축을 어떻게 발전적으로 구현할지 고민했다"고 전했다.
건국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를 지낸 임태병 소장은 오픈하우스 행사를 통해 나상진이 지은 스타벅스 장충라운지R점의 건축을 소개했다.
그는 "나상진의 건축은 브루탈리즘(Brutalism)으로 얘기할 수 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유행한 이 건축 양식은 단순한 형태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특징인데 저렴한 데다 효율적이라 보급이 용이했다"며 "최근 브르탈리즘 이미지를 차용한 건물들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핫플레이스가 된 젠틀몬스터 성수 신사옥을 꼽았다.
이 건물은 독창적인 건축물로 주목받았지만, 브루탈리즘의 요소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 디자인됐다.
건축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도 거들었다.
김중업건축박물관 김다해 학예연구사는 "건축문화유산은 낯선 장르라 최근에야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있다"며 "재건축, 재개발 이슈로 많은 부침이 있었는데 이제 문화유산의 관점에서 이런 건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남겨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정인하 교수도 "1세대 현대건축가들이 배출한 후배 건축가들을 통해 우리나라 건축의 수준은 높아졌고 건축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다만 남기는 게 마냥 쉬운 건 아니다. 1세대 현대건축물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시장 반응 때문에 사라졌다. '시간'이 가혹한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김다해 연구사는 "건축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근·현대 건축물이 어떤 양식과 공법으로 지어졌는지 알려면 도면만 있어선 안 된다. 건축물만 있어서도 안 된다"면서 "남겨진 자료도 별로 없는데 건축물까지 사라지면서 건축문화유산을 후대로 이어주는게 쉽지 않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변형은 건축의 숙명인 만큼 이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정인하 교수는 "노후화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변형을 원하기도 해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시간이 흐르며 건축의 가치가 나타나고 주변의 환경이 달라지면 남겨둘 것, 부숴야 할 것이 판단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근·현대 건축물들은 지어진 지 100년이 안 돼 문화재로 지정될 수 없고 김중업 건축·김수근 건축이라고 모든 걸 남겨 둘 수도 없다"면서 "최근 건축문화유산으로 보는 시선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문화재 등으로 지정될 경우 이를 복원하는 아카이빙 작업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다행인 건 원형에 가깝게 건축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이미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쿠움파트너스는 서울 서대문구 김중업의 '장석웅 주택'을 인수해 재건 작업을 한 뒤 '연희정음'으로 문을 열었다. 쿠움 대표인 김종석 건축가는 "지붕 위 삼각전돌을 구할 수 없어 사각형의 벽돌을 대각선 방향으로 일일이 잘라냈다"고 귀띔했다.
스타벅스는 나상진이 장충동에 지은 주택에 매장을 낼 때 원형을 보존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령 계단 손잡이를 개정된 안전 기준에 맞출 때 손잡이 기둥 중간 패널 안에 길이를 연장한 기둥을 숨겨 원형을 해치지 않도록 했다.
새로운 공간을 더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희정음 앞 전시 공간은 김중업의 건축을 가리지 않도록 통유리로 만들었다. 옛 공간사옥도 1996년 구사옥 옆 신사옥을 통유리 건물로 지었다. 당시 장세양 건축가가 벽돌건물을 가리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1세대 현대건축을 지키는데 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건축문화유산을 남기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쓰임'이다.
앞서 소개한 스타벅스의 '장충라운지R점', 연희정음의 '푸어링아웃 메라키', 아라리오뮤지엄의 '카페 프릳츠'는 재생, 리모델링을 통해 각각 나상진·김중업·김수근의 건축 공간에 자리했다. 카페를 통해 사람들은 1세대 현대건축물 안에서 공간을 경험했다.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아라리오그룹은 2013년 공간사옥을 경매로 사들인 뒤 구사옥인 벽돌건물은 미술관, 신사옥인 유리건물은 레스토랑, 한옥은 카페로 쓰고 있다. 미술관인 아라리오뮤지엄에는 아라리오 창업주인 김창일 회장이 40년 넘게 수집해온 현대미술컬렉션을 보여주고 있다.
연희정음 역시 '장석웅 주택'이라는 별칭처럼 개인 주택으로 지어졌지만, 이를 인수한 김종석 대표의 재생 작업을 통해 전시나 팝업 공간으로 쓰고 있다. 지난해 11월 첫 전시도 열렸다. '르코르뷔지에 × 김중업 건축사진전'이라는 주제로 열린 '대화: 두 건축가의 운명적 만남'이다.
김종석 대표는 "건축이라는 공간은 추억이 함축된 시간을 품고 있다"면서 "전시를 보러 왔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이 공간 안에서 가치있는 추억을 만들어 가면 어떨까 싶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예고하려고 한다. 다음에 만날 카페는 문화와 커피가 있는 공간, 오스트리아 빈의 '카페 뮤지엄'이다.
y27k@fnnews.com 서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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