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올림픽서 금2·동1 놀라운 퍼포먼스, 한국 쇼트트랙 ‘김길리 시대’ 맞았다


“다음 올림픽은 없다”고 선언한 최민정은 그 순간, 후배 김길리(이상 성남시청)를 떠올리며 흐뭇해했다. 그는 “이제 길리가 잘할테니 제가 편하게 (은퇴하고)쉴 수 있을 것 같다”며 미소지었다.
한국 쇼트트랙에 김길리의 시대가 열렸다. 김길리는 지난 21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여자 1500m 결승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김길리는 이번 올림픽 한국 선수단에서 세 번째 금메달의 주인공인 동시에 2관왕에 오른 유일한 선수가 됐다. 김길리는 올림픽 데뷔전인 이번 대회에서 1000m에서 동메달을 따낸 것을 시작으로 단체전 금메달, 그리고 주 종목 1500m에서도 금메달을 추가했다.
최민정의 올림픽 마지막 무대임을 발표한 이번 올림픽에서 김길리는 새로운 에이스의 탄생을 알렸다.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메달을 3개 이상 딴 선수는 2014년 소치 대회 심석희(금1 은1 동1) 이후 12년 만이다. 금메달 2개가 포함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김길리의 성적이 조금 더 두드러진다. 한국 쇼트트랙의 전설 전이경, 동·하계 올림픽 역대 한국 선수 최다 메달 신기록(7개)을 세운 최민정도 첫 올림픽 무대에서 3개 메달을 따지 못했다.
이날 경기는 김길리가 늘 ‘우상’이라고 밝혀온 최민정과 어쩌면 대표팀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뛰는 레이스가 될 수 있다. 이 무대에서 둘은 그야말로 환상의 콤비 플레이와 경기력을 선보였다. 김길리와 최민정은 레이스 중반까지 중간에 나란히 포진했다. 그러다 7바퀴를 남기고 최민정이 먼저 아웃코스로 빠지며 스피드를 끌어올려 2위로 올라섰다. 김길리가 뒤따라 3위로 따라붙었다. 선두 커린 스토더드(미국)가 후반 레이스에서 조금 처지기 시작하자, 한국에 역전 찬스가 왔다. 3바퀴를 남기고 나란히 스퍼트를 올렸다. 최민정이 아웃코스로 나서자 이를 견제하는 스토더드의 움직임을 간파한 김길리가 안쪽을 파고들었다. 서로 짠 것은 아니지만 탄성을 자아낸 완벽한 호흡이었다.
두 선수가 선두권을 꿰차며 둘 사이의 금메달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결승선 2바퀴를 남긴 직선주로에서 김길리가 최민정을 제치며 1위로 올라섰다. 김길리가 마지막 바퀴에서 강한 체력을 앞세워 최민정과 거리를 더 벌리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김길리의 시대가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김길리는 일찌감치 최민정의 뒤를 이을 차세대 쇼트트랙 에이스로 주목받았다. 서현고 재학 시절부터 또래 선수들 가운데 단연 두각을 보였고, 시니어 데뷔 시즌이던 2022~202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에서 종합순위 4위에 오르며 가능성을 증명했다. 2023~2024시즌에는 월드컵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톱레벨로 올라섰다. 한국 여자 선수의 월드컵 종합우승은 2017~2018시즌의 최민정 이후 6년 만이었다.


김길리는 커리어 초반 찾아온 고비도 잘 이겨냈다. 상대의 집중 견제가 시작되며 다음 시즌 세계 랭킹 1위에서 내려왔다. 첫 종합국제대회인 2025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 여자 3000m 계주 결승에서는 선두를 달리다 넘어지는 바람에 메달을 날리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첫 메달레이스인 혼성 2000m 계주 준결승에서 스토더드와 충돌해 넘어지며 마음의 부담은 커졌다.
김길리는 결국 스스로 일어났다. 여자 1000m 동메달로 첫 올림픽 메달을 따낸 뒤 “메달을 걸어보니 생각보다 무겁다. 앞으로 더 높은 자리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 것 같다”고 말한 김길리는 이후 금빛 레이스로 금메달 2개를 추가했다.
대회 2관왕에 성공한 김길리의 성장을 본 최민정은 “사실 저도 과거에 전이경, 진선유 선배님들을 보며 꿈을 키웠다. 길리도 저를 보면서 꿈을 키우고 그걸 이뤄가는 과정에 있으니 더 뿌듯하다”고 말했다. 최민정의 대표팀 은퇴 소식에 눈물이 터진 김길리는 “쇼트트랙 선수로 언니처럼 되려고 훈련했다. 언니처럼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다”며 울적이며 말했다.
밀라노 | 이정호 기자 alp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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