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석 같은 밤하늘 지켰다…칠레, 산업단지 아닌 천문대 택한 사연은?

이정호 기자 2026. 2. 2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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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 안데스, 산업단지 조성 계획 전격 철회
건설 부지 인근에 있는 고성능 천문대 때문
대규모 공장 들어서면 인공조명 발산 불가피
별 관측 치명타 입힐 가능성에 “안 짓겠다”
과학계·국제사회·현지 정치권 압박 결과
지난해 6월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파라날 산 위로 은하수가 펼쳐져 있다. 이 산에는 ‘파라날 천문대’가 설치돼 있다. 유럽남방천문대(ESO) 제공

# “아름답다”라는 말로는 이 광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흰색, 분홍색, 노란색 등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이 뒤섞인 밤하늘의 은하수는 보는 이의 넋을 빼놓는다. 검은 스카프 위에 보석을 흩뿌린 듯하다.

여기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있는 해발 2635m ‘파라날 산’이다. 산꼭대기에는 파라날 천문대가 있다. 유럽 16개국이 모인 연구 조직 ‘유럽남방천문대(ESO)’와 칠레 당국이 함께 운영하는 천체 관측 시설이다.

고즈넉해 보이기만 한 이곳에서는 사실 지난 1년여간 평지풍파가 있었다. 천문대 인근에서 산업단지 건설 계획이 추진된 것이다. 산업단지에는 시설 관리를 위해 밝은 인공조명이 다수 설치된다. 하늘로 퍼진 인공조명은 흐릿한 별빛을 덮어 천문 관측을 방해한다. 천문대 근처 인공조명은 클래식 음악 공연에 찬물을 끼얹는 시끄러운 휴대전화 벨 소리와 같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산업단지 등장을 크게 우려했다. 그런데 이달 들어 그런 걱정이 돌연 사라졌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칠레 파라날 천문대를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칠레 아타마카 사막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광해’가 극히 적다. 유럽남방천문대(ESO) 제공
산업단지 건설 전격 철회

유럽남방천문대(ESO)는 이달 공식 자료를 통해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에서 추진되던 산업단지 건설 계획이 전격 철회됐다고 발표했다. 미국 기업의 칠레 현지 자회사 AES 안데스가 칠레 당국에 산업단지를 짓지 않겠다는 의사를 통보한 것이다.

산업단지를 지으려다가 마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건설 이후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리라고 예상되거나 공사할 자금이 부족해지는 경우다.

이번 건설 취소는 상황이 다르다. 취소 이유가 과학 시설, 즉 파라날 천문대다. 파라날 천문대는 독특한 곳이다. 영국 왕립천문학회 자료를 보면 파라날 천문대는 전 세계 28개 주요 천문대 가운데 ‘광해(인공조명으로 별빛이 잘 안 보이는 현상)’가 가장 적은 곳이다.

이는 입지 때문이다. 파라날 천문대는 남한과 비슷한 10만5000㎢ 면적의 광대한 아타카마 사막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공장이나 주택가가 주변에 없어 광해도 매우 적다.

파라날 천문대에는 이런 조건 때문에 세계 최정상급 관측 장비가 들어와 있다. 초거대 망원경(VLT)이다. 주경(별빛을 모으는 거울) 지름이 8.2m에 이르는 총 4대의 망원경이 VLT를 구성한다. 주경 지름이 약 4m만 돼도 대형 망원경으로 분류된다. 이를 고려하면 VLT는 ‘괴물 망원경’이다. 2011년과 202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VLT가 찍은 별 관측 결과로 논문을 썼다.

천문과학계 “광해 35% 증가”

이런 파라날 천문대 인근에 산업단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2024년 12월 칠레 현지와 전 세계 과학계에 알려졌다. 사업 용지가 여의도 10배에 달하는 30㎢였는데, 특히 논란이 된 것은 파라날 천문대까지 거리였다. 11㎞가 떨어져 있었다.

이 거리가 왜 문제였을까. 산업단지에는 야간에도 공장을 살필 수 있도록 밝은 인공조명이 다수 설치된다. 11㎞는 이런 인공조명을 완전히 피하기에는 너무 가까웠다.

어떤 좋은 망원경도 환한 인공조명에 묻혀 버린 별빛을 억지로 끄집어낼 수는 없다. 현재 파라날 천문대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 즉 인공조명 발산 지역은 120㎞나 떨어져 있다.

과학계는 산업단지 건설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것을 했다. 주장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수치를 계산했다. ESO는 지난해 3월 산업단지가 생기면 파라날 천문대 상공에서 광해가 35% 증가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천문대 기능에 치명상을 입힐 수치다.

여간해서는 보기 힘든 과학자들의 집단행동도 나타났다. 202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독일 과학자 라인하르트 겐젤 등 전 세계 유명 천문학자 28명이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에게 지난해 11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산업단지 건설은 파라날 천문대에 즉각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제사회·칠레 대선서 이슈

국제사회도 움직였다. 지난해 3월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파라날 천문대를 방문해 “(이곳은) 마법 같은 장소”라며 “광해에서 영구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파라날 천문대 운영 주체인 ESO 회원국이다.

지난해 12월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 문제는 도마 위에 올랐다. 정치·사회 의제가 주로 제기되는 대선에서 광해가 이슈로 떠오른 것은 이채롭지만, 칠레에서는 이유가 있는 일이다.

칠레에는 아타카마 사막을 중심으로 전 세계 대형 망원경 40%가 모여 있다. 이 때문에 칠레는 많은 혜택을 본다. 자국 땅에 건설된 외국 망원경 관측 시간의 10%는 칠레 과학자들에게 돌아간다. 천체 관측에 필요한 장비를 만드는 과정에 칠레 기업이 참여한다. 천문대는 관광 자원으로도 활용된다.

칠레 차기 정부가 파라날 천문대의 광해 가능성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칠레의 ‘천문 강국’ 유지 여부에 영향을 줄 것이니만큼 대선에서 이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이 같은 국내외 압박이 결국 산업단지 건설 철회로 이어졌다. 이치아르 데 그레고리오 몬살보 칠레 주재 ESO 대표는 “밤하늘은 세계적 수준의 천문학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대체 불가능한 자연유산”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과학계는 건설이 취소된 산업단지가 친환경 에너지인 수소를 생산하기 위한 곳이었다는 점을 엄중히 보고 있다. 혹시라도 “별을 보려고 탈탄소화 기조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비에 바콘스 ESO 사무총장은 “녹색 에너지 생산이나 지역 발전을 이끄는 산업 프로젝트는 충분한 거리만 확보된다면 천문대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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