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야?” “인자한 할아버지야?”…따스한 미소 뒤에 숨겨진 ‘그 사람’의 ‘얼굴들’ [음덕후:뮤지션으로 읽다]

김주리 2026. 2. 2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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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 1977년 산울림으로 ‘산울림 새노래 모음’ 통해 데뷔
노래·연기·라디오 DJ·작가 등 다양한 문화 활약…한국음악의 ‘거장’
김창완 밴드로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 중…최근 발매 음반 전국투어까지
음악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콘텐츠
김창완 밴드의 ‘세븐티’(Seventy) 앨범 커버. [뮤직버스]
“음악이라는 것은 나를 반영하는 창구다. 음악이 나의 해방구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음악으로부터 달아났을 수도 있다. 어디가 나의 출발점이고 목표인지 불분명하다. 어떤 음악에서는 달아나고 싶고, 어떤 음악으로는 향하고 있다”

김창완 인터뷰 中
[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영화 속에서는 서늘한 눈빛으로 사이코패스의 광기를 드러내고, 무대 위에서는 ‘개구장이’를 부르며 해맑은 에너지를 분출하고,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친구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한 명의 인간에게 이토록 많은 얼굴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한국음악의 거장, 산울림 출신의 김창완은 좀처럼 단일한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다. 부드럽게 웃다가도 돌연 깊은 침묵으로 빠지고, 따스한 말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남는다. 천진함과 염세, 낭만과 초연이 동시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러면서 한 순간에 존재하는 ‘얼굴들’.

그러나 그 스스로의 말에 따르면 이는 모순이 아니다. 김창완 정체성의 응축인 음악은 그에게 해방구이면서 달아나고 싶은 장소이고, 출발점이면서 목표다. 달아남과 향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자리, 그렇다면 그의 여러 얼굴 역시 하나의 정체성이 흔들린 결과라기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내면이 표면으로 드러난 흔적에 가깝다.

어쩌면 그는 많은 얼굴을 가진 다중적인 사람이 아닌, 어떤 표정에도 오래 머무르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붙잡지 않고, 고정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태도. 감정을 과시하지 않고, 삶을 단정하지 않으며 언제나 조금의 거리를 유지하는 관망. 이 지점에서 그의 첫 번째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 산울림 ‘청춘’ 中 -
김창완은 좀처럼 단일한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다. 부드럽게 웃다가도 돌연 깊은 침묵으로 빠지고, 따스한 말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남는다. 그의 얼굴에는 천진함과 염세, 낭만과 초연이 동시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러면서 동시에 한 순간에 존재한다. [뉴시스]

염세와 허무 그 어딘가, 얼굴 한 켠에 비쳐진 ‘서늘함’

김창완의 음악을 따라가다 보면 밝음과 천진함 아래 가라앉은 또 다른 정서가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분노도, 절망도 아닌, 세상을 이미 한 차례 통과한 사람의 허무에 가깝다.

산울림의 초기 곡들 속에는 청춘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흐릿한 서늘함과 광기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규의 형식으로 터져 나오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게’ 스며든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어조. 낭만을 노래하면서도 그 낭만이 결국 사라질 것임을 전제한 태도. 이 이중적인 정서가 김창완 음악의 첫 번째 얼굴이다.

보컬에서도 허무를 드러내는 방식을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절대, 결코 노래 안에서 감정을 강제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이는 어딘가 힘을 남겨둔 채 흘려보내는 방식에 가까운데, 내면의 고뇌를 쏟아내지 않고 그 쏟아냄을 붙잡는 ‘멈춤’이 그의 음악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여백에는 설명되지 않는 체념이 놓여 있다. 완전히 무너지지도, 완전히 희망하지도 않는 중간 지점. 그 곳에서 김창완 노래의 진가가 발휘된다.

드라마나 영화 속 광기 어린 악역 연기 역시 이 허무의 연장선상에 있다. 과장되지 않은 섬뜩한 광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은 ‘고요한 분노’로 들끓는다. 세계의 민낯을 지나쳐 온 듯한, 차갑게 식어 있는 감정, 그렇기에 더욱 서늘하고 공포스럽다.

결국 그의 음악과 연기 속에서 느껴지는 냉기(冷氣)는 세상을 향한 기대를 조금은 거둔 사람의 얼굴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염세는 파괴적이지 않다. 체념에 가까우면서도 오히려 투명하다. 허무를 부정하지 않되, 그 허무에 잠식되지도 않는다. 해맑음 아래 깔린 이 서늘함은 그의 작품을 동시에 지탱하는 기저의 정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의 또 다른 얼굴, ‘개구장이’와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산할아버지’와 같은 순수한 아이의 해맑은 정서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꼬마야 꽃신 신고
강가에나 나가 보렴
오늘밤엔 민들레 달빛 춤 출텐데
너는 들리니 바람에 묻어오는
고향빛 노래 소리
그건 아마도 불빛처럼 예쁜 마음일거야
- 산울림 ‘꼬마야’ 中 -
김창완의 소년성은 단순히 밝은 표정과 멜로디가 아니라, 태도의 선택과도 닮아 있다. 세월을 지나치며 무뎌질 법한 감각을 끝까지 놓지 않는 태도,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정을 복잡하게 소비하지 않는 절제, 이는 순진함이라기보다 오히려 단단한 감수성에 가깝다. 삶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되, 그 위에 다시 노래를 얹는 힘이다. [연합]

그런데 또 이런 얼굴이?…가공되지 않은 순수함, 지워지지 않은 소년성

‘개구장이’의 가벼운 리듬,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의 엉뚱한 장난기, ‘산할아버지’의 동요 같은 서정은 표면만 봤을 때 천진난만함 그 자체다. 그러나 이 노래들을 단순히 ‘이미지’로 치환해버리기에는 전부 설명되지 않는 ‘진심’이 담겨 있다.

김창완에게서는 계산된 유쾌함이 아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튀어나오는 순수함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질문을 던지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엉뚱하게 비켜간 답을 내놓거나, 소년처럼 웃으며 말을 맺는다. 이 같은 얼굴에는 방어도, 연출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아직 세상으로 인해 닳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는 사람처럼.

그의 음악 속 천진함 또한 그렇다. 이는 세상을 아직 모르는 사람의 가벼운 낙관이 아닌, 세상을 이미 알고도 완전히 닫히지 않은 감수성에 가까운데, 허무를 안고 있지만 허무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은, 체념을 경험했지만 세상을 등진 냉소로 굳지 않은 상태와 닮아 있다. 그렇기에 그의 해맑음은 가볍지도 얄팍하지도 않다.

라디오에서의 모습 또한 같은 결이다. 다정하지만 들러붙지 않고, 친근하지만 과잉 친밀로 흐르지 않는다. 그 거리감은 염세의 변주인 동시에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를 전제로 한다. 세상을 믿지 않지만, 사람을 포기하지 않은 태도. 결국 김창완의 천진함은 전략이 아닌 본질적인 성향에 좀 더 가깝다. 닳지 않는 감수성과 냉소를 알고 있지만 여전히 환하게 웃음을 수 있는 힘. 그리고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얼굴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존재하며 그의 음악을 지탱한다.

그렇기에 그의 소년성은 단순히 밝은 표정과 멜로디가 아니라, 태도의 선택과도 닮아 있다. 세월을 지나치며 무뎌질 법한 감각을 끝까지 놓지 않는 태도,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정을 복잡하게 소비하지 않는 절제, 이는 순진함이 아닌, 단단한 감수성이다. 삶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되, 그 위에 다시 노래를 얹는 힘이다.

기대어 잠들어버린 아이처럼
하늘나라 어여쁜 우리 천사처럼
천진한 그 얼굴엔 사랑만이 흘러내리네
꽃 속에 잠들어라 노랑나비야
그 날개 속에 고운 꿈을 꾸려무나
어여쁜 내 사랑아 꿈길에서 만나봐야지
- 산울림 ‘기대어 잠든 아이처럼’ 中 -
김창완은 성공을 설명하지 않고, 영광을 복기하지 않으며,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면 언제나 한 발 옆으로 비켜 선다. 스스로를 중심에 두지 않는 태도, 이것은 겸손의 제스처라기보다 애초에 자신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붙들지 않는 사람의 방식과 닿아 있다. [연합]

세속에 머물되, 매달리지 않는다…수도승의 얼굴과 음악적 ‘천재성’

김창완의 또 다른 얼굴은 수도승의 얼굴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을 부정하거나 등지는 금욕이 아니다. 그는 무대에 서고, 방송을 하고, 영화에 출연하며, 대중문화의 중심에 오랜 시간 머물러 왔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이상하리만치 ‘매달림’이 없다. 성공을 설명하지 않고, 영광을 복기하지 않으며,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질문을 던지면 언제나 한 발 옆으로 비켜 선다. 스스로를 중심에 두지 않는 태도, 이것은 겸손의 제스처라기보다 애초에 자신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붙들지 않는 사람의 방식과 닿아 있다.

그의 오래된 음악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감정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며, 의미를 완성형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여백을 ‘흘려보낸다’. 붙잡지 않기에 오래 남는 선율, 밀어붙이지 않기에 스며드는 가사, 이러한 것들이 그의 음악을 단순한 감성의 산물이 아니라 ‘경지’에 가까운 작업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김창완의 음악적 천재성이 드러난다. 그는 특히 인간의 복잡한 정서를 음악적인 구조로 환원하는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데 대단히 능한데, 이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인트로 속 몇 마디의 기타 리프만으로 공간의 공기를 뒤틀어버리는 파트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리프가 시작되는 순간, 듣는 이는 현실에서 한 발 떨어진 채 낯설면서도 따뜻한, 몽환적이면서도 건조한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설명하지 않은 채 분위기를 창조하는 능력. 이것은 기술을 넘어 선 그의 음악적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너의 의미’ 또한 그렇다. 사랑을 노래하지만 과장되지 않으며, 동화처럼 맑은 언어로 쓰였지만 그 안에는 어른의 시간이 스며 있다. 단순한 고백처럼 들리지만 반복해서 들을 수록 정서의 층위가 깊어진다. 그리고 듣는 이는 이를 듣고, 느끼며 자신의 사랑과 애정과 애착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이 같은 특성으로 인해, 김창완의 음악은 특정 시대의 유행에 고정되지 않는다. 단순한 멜로디와 소박한 언어 안에 쌓인 시간은 쉽게 닳지 않는다. 이는 기술로 증명되는 천재성이 아니라, 감각과 통찰로 축적된 천재성에 가깝다.

너의 그 한 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 산울림 ‘너의 의미’ 中 -
인터뷰에서 김창완 자신이 말했듯, 음악은 그에게 있어 해방구이면서 달아남의 장소이고, 출발점이면서 목표다. 그의 여러가지 얼굴들 역시 그렇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향하는지 분명히 규정할 수 없는 흐름, 김창완은 끝내 하나의 표정으로 남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그 점이, 우리가 그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연합]

김창완은 ‘많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서늘함도, 순수도, 낭만도, 초연도 잠시 스쳐 지나가는 표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그 표정들이 머물렀다 사라지는 통로다.

그렇기에 그의 얼굴은 시시때때로 변화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속세를 살아가되 세속에 묶이지 않는 사람. 노래를 만들되 노래에 갇히지 않는 사람. 김창완의 얼굴들이 쉽게 정의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어느 한 표정에 자신을 고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굳지 않고, 변색되지 않고, 음악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인터뷰에서 김창완 자신이 말했듯, 음악은 그에게 있어 해방구이면서 달아남의 장소이고, 출발점이면서 목표다. 그의 여러가지 얼굴들 역시 그렇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향하는지 분명히 규정할 수 없는 흐름, 김창완은 끝내 하나의 표정으로 남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그 점이, 우리가 그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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