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토와 에겐 사이, 우리가 사랑하는 새로운 남녀상

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6. 2. 2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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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인식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이상형의 등장
극단은 밀려나고 조화로움이 뜬다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에 '테토' '에겐'이라는 표현이 부쩍 자주 등장한다. '테토'는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줄임말로, 활발하고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성향을 뜻한다. 반대로 '에겐'은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의 줄임말로, 감정적이고 섬세하며 내면 중심의 성향을 일컫는다. 과거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분법을 벗어나 성향에 따라 '테토녀'와 '에겐남'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MBTI가 성향을 판단하는 좌표로 유행했던 시절을 지나, 이제 테토와 에겐이라는 좀 더 단순화된 방식으로 성향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얼 말해 주는 걸까.

넷플릭스 예능 《솔로지옥5》에서 '육상계의 카리나' 김민지는 '테토녀'로 불린다. 육상선수 출신으로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피지컬은 물론이고, 연애 전선에서도 거침없이 직진하는 모습을 보여줘서다. 가장 호감 가는 이성을 묻는 진실게임에서도 그는 바로 옆에 앉은 남성을 지목하며 "너, 너, 너!"라고 속 시원하게 말한다. 모두가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속내를 숨기려 할 때, 정반대 태도로 시청자들을 매료시킨다. 천국도 행을 두고 여성 출연자들끼리 대결을 벌일 때도 김민지는 자신이 1등이라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국 예상대로 1등을 차지했다.

예능 《솔로지옥 시즌5》 포스터 ⓒ넷플릭스

테토와 에겐, 당신의 성향은?

이른바 '호르몬 신조어'로 불리는 이 명칭은 네 가지 유형을 만들어낸다. 테토남, 에겐남, 테토녀, 에겐녀가 그것이다. 호르몬의 특징을 떠올리면 그 뜻을 짐작하기 쉽다. 테토는 강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에겐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공감 능력을 상징한다. 물론 이 구분은 때로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지나치게 주도권을 쥐려는 테토나, 지나치게 소극적인 에겐이라는 식이다.

MBTI가 그랬듯, 호르몬으로 구분 지은 남녀의 성향 또한 재미 차원에서 만들어진 놀이적 성격이 짙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의 구분과 대중의 반응을 들여다보면 현시대가 기대하는 남성상과 여성상에 대한 단상들을 그려낼 수 있다. 드라마 속 남성상·여성상의 변천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까지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들은 대체로 카리스마를 앞세운 '테토남'이었다. "애기야 가자!"라는 대사로 유명한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박신양), 직원들을 거칠게 대하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현진헌(현빈), 극 중에서 버럭대는 장면이 많아 '버럭범수'로도 불렸던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 "똥.덩.어.리."라는 대사로 화제를 모은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 같은 이들이다. 테토남들의 상대는 대체로 갑을관계에서 을의 위치에 있거나, 외로워도 슬퍼도 씩씩한 신데렐라·캔디형의 에겐녀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테토남-에겐녀 구도의 멜로 남녀 구성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되고 젠더 의식도 확산되면서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에겐남들(드라마 《남자친구》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속 남자주인공)이 대세로 떠오름과 동시에 솔직하게 직진하는 테토녀들이 오피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게 됐다. 즉, 대중이 요구하는 남성상과 여성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과 젠더 의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는 것이다.

테토와 에겐 뒤에 남녀가 모두 붙는 것처럼, 이제 호르몬으로 표현되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남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성향으로 이해된다. 남성이 남성성을, 여성은 여성성을 가져야 한다는 단순한 등식이 아니라, 성별과 무관하게 누구나 두 성향을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사회적 의식이 과거보다 확연히 높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남자가' 혹은 '여자가'라는 표현이 차별적 뉘앙스를 동반하는 시대가 아닌가. 이제 대중은 남성도 여성성을, 여성도 남성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드라마 《스프링 피버》 포스터 ⓒtvN

극단 대신 조화, '테겐'과 '에테'의 등장

흥미로운 건 최근 테토와 에겐을 모두 갖춘 '테겐'이나 '에테'라는 표현이 새로운 이상형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tvN 월화드라마 《스프링 피버》의 선재규(안보현)라는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이 인물은 187cm의 키, 80kg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전형적인 물리적 테토남이다. 등장부터 눈보라를 불러일으키고, 발걸음마다 '쿵쿵' 효과음이 더해지는 과장된 연출로 테토적인 이미지를 강조한다. 소방차 통행을 방해하는 차량을 맨손으로 밀어내는 괴력을 발휘하고, 거친 경상도 사투리로 듣는 이들의 오금을 떨게 만든다.

이 전형적인 테토남의 면모는 겉모습에 불과하다. 그의 내면은 한없이 에겐적이다. 사랑하는 여주인공 윤봄(이주빈) 앞에서는 수줍음을 타고, 당황한 나머지 벤치를 들었다 놨다 하는 순진무구한 소년 같은 모습을 보인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실은 세심한 배려를 남몰래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외향은 테토, 내면은 에겐을 지닌 '테겐남'이라 불린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소 과장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지만 이 '테겐남' 같은 판타지적 인물은 현재 여성들이 기대하는 남성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섬세한 공감 능력을 갖추되, 그렇다고 초식남처럼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하지는 않은 남성상에 대한 욕망이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는 테겐남의 반대 버전처럼 보이는 '에테남'도 등장한다. 겉으로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필요할 때는 단호하고 주도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남성 말이다. 이처럼 테토와 에겐이 결합한 이상형의 등장은, 두 성향의 장점만을 취한 균형 잡힌 인물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남성성이나 여성성은 남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기질로 인식되지만, 현시대 대중은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진 성향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극단적인 테토남과 에겐녀는 과거 가부장적 사회의 구시대적 인물로 치부된다. 그래서 남성은 에겐적 면모를 요구받고, 여성은 테토적 주체성을 갖추는 것이 현시대의 매력적인 이성상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대의 욕망은 당대의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다. 데이트 폭력, 가부장제의 억압, 독박 육아와 가사 문제 같은 현실을 경험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유해하지 않으면서도 평등한 관계를 맺는 상대였다. 이런 분위기가 과거 카리스마를 내세우던 테토남을 밀어내고 에겐남을 부상시킨 것이다. 남녀 관계에서 주도권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남성의 매력은 이른바 '무해함'으로 불렸는데, 이 표현은 정반대로 말하면 '유해한 남성들'을 상정해 나온 매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에겐남이 대중문화 콘텐츠에 반복 등장하면서, 그 세심함이 때로는 소심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에겐에 테토적 면모까지 요구받게 된 것이다. 테겐남은 이런 배경 위에서 등장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에겐녀의 위치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던 여성들은 콘텐츠 속에서 보다 능동적인 커리어를 드러내는 테토녀로 그 호감이 이동했다.

결국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상과 여성상이란 어느 한쪽에 고착되지 않고 양면을 모두 갖춘 인물인 셈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면서도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다정한 인물. 테토와 에겐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인물이 사랑받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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