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연 판결 소환된 찰스 1세, 국민 무시하다 참수돼
"하느님이 주신 권리로 이 자리 있었다" 배짱
반성 없는 권력은 국민을 소모품으로 보더라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제도적 진보는 이뤄져
찰스 1세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남긴 가르침

왕 중의 왕, 혹은 고집 중의 고집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잉글랜드 왕으로는 제임스 1세, 1566~1625)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왕위는 형 헨리 프레더릭(1594~1612)이 이어받을 예정이었으나, 형이 열여덟에 요절하는 바람에 찰스가 왕좌에 앉게 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왕세자가 갑자기 왕이 된 셈이다. 이게 비극의 씨앗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을까.

돈, 세금, 그리고 의회와의 전쟁
찰스 1세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왕실 살림이 늘 쪼들렸고, 전쟁(특히 프랑스, 스페인과의 분쟁)을 치르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걷으려면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찰스는 이게 너무 싫었다. "내가 왕인데 왜 저 사람들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냐"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1629년, 의회를 아예 해산해 버렸다. 그리고 무려 11년 동안 의회 없이 혼자 나라를 다스렸다.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전제통치 시기(Personal Rule)" 혹은 냉소적으로 "11년의 독재"라고 부른다. 의회 없이 세금을 걷으려다 보니 온갖 편법이 동원됐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이 "선박세(Ship Money)"였다. 원래 해안지방에만 부과하던 세금을 내륙지방에까지 확대한 것이다. 국민들 눈에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종교문제,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반란
찰스의 삽질은 종교분야에서도 계속됐다. 그는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의식을 스코틀랜드에도 강요하려 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에든버러 성 자일스 대성당에서 새 예배방식을 강제로 도입하려 하자 성난 신자들이 의자를 집어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내전, 그리고 단두대
내전의 한쪽에는 왕당파(기사당), 다른 한쪽에는 의회파(원두당)가 있었다. 의회파를 이끈 핵심 인물은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었다. 청교도 신앙으로 무장한 군인 정치가였던 그는 찰스의 군대를 마스턴 무어 전투(1644년)와 네이즈비 전투(1645년)에서 연달아 격파했다.
1646년 찰스는 스코틀랜드 군에 자진 투항했고, 이후 의회에 넘겨졌다. 그런데 찰스는 포로가 된 상태에서도 협상을 질질 끌고, 몰래 스코틀랜드와 협약을 맺어 재기를 꾀하는 등 교활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크롬웰을 비롯한 강경파 군인들이 결단을 내렸다.

찰스 이후, 공화정, 그리고 왕정복고
찰스를 처형한 뒤 잉글랜드는 공화정 체제인 "영연방(Commonwealth)"이 되었다. 크롬웰은 1653년부터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이라는 칭호로 사실상 독재를 펼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을 없애고 들어선 권력이 왕보다 더 권위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 이쯤에서 한반도로 눈을 돌려 보자. 찰스 1세의 이야기는 370년 전 먼 나라 이야기이지만, 묘하게 익숙한 냄새를 풍긴다.
"나는 법 위에 있다"고 믿는 권력자, 의회와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통치자, 자신의 권력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 착각하는 지도자. 우리도 이런 모습을 낯설지 않게 목격해 왔다.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 윤석열이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국민이 뽑은 의회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고, 군을 동원해 헌정질서를 뒤흔들려 한 것이다. 찰스 1세가 의회를 해산하고 11년을 혼자 다스리려 했던 것과 어딘가 닮아 있지 않은가.
찰스 1세의 비극은 '반성하지 않는 권력'의 전형을 보여 준다. 그는 끝까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두대에 오르는 순간에도 "나는 옳았다"고 말했다. 이 완고함은 비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위험한가. 반성 없는 권력은 국민을 소모품으로 본다. 국민은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이 사건이 역사에 남긴 유산은 놀랍도록 긍정적이다. 왕을 재판하고 처형했던 그 경험이 "권력자도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인류 역사에 새겼다. 그 뒤 이어진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은 근대 민주주의의 교과서가 됐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제도적 진보는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이 찰스 1세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남긴 선물이다. 그의 죽음을 소환한 지귀연 부장판사가 놓친 대목이기도 하다.
우리는 찰스 1세의 재판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다시는 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고칠 것인가. 그 질문이 더 중요하다. 잉글랜드도 왕정복고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비로소 입헌체제를 굳혔다. 우리도 이 혼란을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까. 그것은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

wadans@empas.com